구약성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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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이며, 본 명칭은 '[[타나크]]이다. 전통적인 증언은 기원전 1500년~400년 사이에 유대민족의 구전 전승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서학계에서는 실제 문헌 작성 연대를 훨씬 나중으로 이해한다. [[토라]](모세오경)의 경우에는 주로 유대왕국 후반부터 바빌론 유수기에, [[케투빔]](성문서)와 [[느비임]](예언서, 선지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부터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의 타나크 내 24권의 모든 문서가 유대교의 경전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AD 90년 경의 얌니야 회의로 추정되어 왔다.(그러나 얌니야 회의에서 특정한 문헌의 타나크 목록 추가 및 배제가 논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은 얌니야 회의는 나자렛 이단 세력(후의 기독교)의 축출을 주 목적으로 하였다고 본다.)
 
확실한 것은 구약성경 목록 확정의 공식적인 증거 자료는 2세기 경에나 비로소 나온다는 것이다. 1세기 말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에서 22권의 정경이 언급되었지만 세부 목록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며, 1세기 말 작성으로 추정되는 [[에스드라 2서]]에서는 24권의 현 [[타나크]]와 같은 책 숫자가 언급되지만 역시 문헌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2세기에 작성된 '바바 바트라'에서 타나크 24권의 목록이 전체적으로 처음 언급된다. 하지만 동시대에 사르디스의 주교인 '멜리토'가 제시하는제시한 좁은 성경 22권과의 목록과의 상이성을 보면, 확정된2세기 경 결정된 [[타나크]] 2세기목록이 경의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된다제기될 수 있다. 혹은한편으로는 멜리토 이전의 초대교회가 당시 유대교 정경 결정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f>에우세비오스, 교회사 4.26.13. 14 / 리 마틴 맥도날드, 성경의 형성, 솔로몬, 2015, pp.147~148 참조</ref>
 
이러한 구약성경의 각 문헌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증언에 주로 의존해 왔지만(벤 시락의 집회서나 에스라 등의 증언), 성서학계의 연구는 여러 갈래의 전승들이 본문 비평을 통해 다양한 기록자에 의해서 기록, 채색되었고, 지역 및 시대에 따라서 다른 갈래의 문서들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히브리어 전통을 보존했던 팔레스타인의 바리사이파 랍비들은 그렇지 못했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 비해 신학적인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세력이 지지하는 문서와 그 목록이 경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얌니야 회의]]이후 이들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한 문서들이 [[유대교]] 안에서 경전성을 배제당하는데, 신뢰성 있는 히브리어 원문의 존재 유무가 가장 핵심적인 경전성 결정의 기준이 되었다. 이전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새롭게 대두되던 기독교 세력이 사용하던 그리스어 번역 성경인 70인역은 얌니야 회의에서 인정된 히브리어 성경인 타나크와의 내용적 차이의 문제와, 히브리어 원문이 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존재하는 문헌들도 있어 그 출처의 신뢰성을 의심받았고, 결국 [[유대교]] 안에서 축출당하였다. 70인 역을 대신하여 유대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타나크를 대본으로 하여 아퀼라역을 새롭게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