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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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상으로는 멜리투스의 것처럼 정리된 목록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나, 다수의 초대교회 교부들은 2경전이나 일부 외경들도 성경으로서 인용하는 이른바 '넓은 성경 목록'의 입장에 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입장들은 교회 내적으로 정리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정경화의 와중에 동/서 교회의 갈등도 점차 본격화 된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게 공인된 이후, 급격히 교세가 확장되면서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을 포함한 경전 확립의 필요성이 요청된 4세기 후엽에 그 갈등은 극에 달하였다. 당시에 경전의 확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아타나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 등의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은 구약 부분에서 유대교 히브리어 경전 본문과 그 목록의 우월성을 주장하였고 특히 히브리어 원본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있는 문헌들을 '[[외경|아포크리파]]'라고 분류하며 그 권위를 상대적으로 낮잡아 보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의 전통적 호교론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공의회]]에서 유대교에게는 인정되지 않은 그리스어 번역본의 경전성을 인정하며 '구약성경'을 일단 확정지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내부에서 비판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저명한 교부들 상당수가 2경전 문헌에 대한 정경성에 의구심을 보이고 비판하였으며, 특히 동방교회에서 [[카르타고 공의회의공의회]]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출처|날짜=2013-9-10|이에 일부 개신교계 성서학자들은 히에로니무스가 경전적인 문헌과 교회의 문헌을 나누어 불가타 성서에 실었는데, 필사자가 구분없이 필사를 하는 바람에 [[제2경전]]도 정경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경에 대한 해묵은 갈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6세기의 [[종교 개혁]]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각 문헌들 사이에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Kanon im Kanon), 이 중 구약정경 구성에 대해서는 유대교 측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칼뱅]]의 경우에도 과거 카르타고 공의회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5년의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정경에 대한 도전적인 주장들을 모두 일축하였고, 제2경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과거에 '[[외경]]'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일부 문헌들에 대하여 다른 성경 문서들과의 동등한 수준의 경전성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