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조선 영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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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정조 사후 간행된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사후에 간행된 그 자신의 《행장》등에서 재확인되는 내용이다.<ref>김귀주와 관련한 《명의록》의 기록. 홍인한-정후겸이 부언을 일삼아 세손을 괴롭혔는데, 이들이 김귀주가 세손에게 독을 쓰거나 자객을 쓸 것이라는 등의 말로 참소하였다 한다. 이에 세손은 '김귀주는 나에게 본래 은덕으로 여기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없으며 저도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염려가 있겠는가.'라고 김귀주를 변호하고 있다. 김귀주를 참소한 것 역시 명의록 죄인들의 죄목으로 거론된다.</ref>
 
{{인용문|나의 자전(慈殿)이 과인의 몸을 보우(保佑)하였음은 인원성후(仁元聖后, [[인원왕후]])가 선대왕(영조)을 보우함과 같았습니다. <br />정조어제 오흥부원군 김한구(정순왕후 부) 치제문 중}}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ref>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와 정순왕후의 대립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ref>《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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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金觀柱)와 김용주(金龍柱)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다.
 
[[1803년]] [[음력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ref>[[#순조실록 (1838)|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312028_001 5권, 순조 3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ref>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1년 뒤인 [[1805년]] 2월 11일([[음력 1월 12일]]),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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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 《[[역린 (영화)|역린]]》([[2014년]], 배우: [[한지민]])
* 《[[사도 (영화)|사도]]》([[2015년]], 배우: [[서예지]])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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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references/>
== 참고 문헌 ==
* {{위키인용 |ref="순조실록 (1838)"| reference ={{서적 인용 |저자=춘추관 관원들 |연도=1838 |제목=[[순조실록]] |ref={{sfnRef|순조실록 (1838)}} }} }}
 
{{전임후임|
전임자=[[정성왕후]]|
후임자=[[효의왕후]]<br />([[효순왕후]])<br />([[헌경왕후]])|
직책=[[조선의 역대 왕비|조선 역대 왕후]]|
임기= [[1759년]] ~ [[17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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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노론 벽파]]
[[분류:한국의 반가톨릭주의]]
[[분류:18세기 한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