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헌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 이숙 (후한)를 가리키는 링크를 이숙 (삼국지)를 가리키도록 변경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2세기 중국 사람; 예쁘게 바꿈
3번째 줄:
== 생애 ==
=== 황제 즉위까지 ===
영제의 차남으로 생모는 [[하태후]]에게 살해당한 [[왕미인]]이다. [[189년]] 7월, 진류왕(陳留王)에 봉해졌다. <ref>《[[:zh:s:後漢書/卷9|後漢書/卷9]]》 “孝獻皇帝[...] 靈帝中子也。母王美人,為何皇后所害。中平六年四月,少帝即位,封帝為勃海王,徙封陳留王。”</ref>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았었다. [[십상시]](十常侍)의 난에 형 [[후한 소제 (13대)|소제]](少帝)와 같이 궁을 떠나 몸을 잠시 피했었다. 서량의 군벌 [[동탁]](董卓)이 변란의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소제와 이야기했으나 그가 알아듣지 못해 다시 진류왕에게 묻자 진류왕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동탁은 진류왕을 키운 것이 자신과 성씨가 같은 [[효인황후|동태후]]인 것을 알고 소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을 황제로 세울 것을 마음먹었다.<ref>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ref> [[낙양]](洛陽)에 입성한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임금으로 세우니 그때 헌제의 나이가 불과 9세였다.<ref>《[[:zh:s:後漢書/卷9|後漢書/卷9]]》 “孝獻皇帝[...]中平六年[...]九月甲戌,即皇帝位,年九歲。”</ref> 연호를 초평(初平)이라 하였다. 동탁이 정치·군사적 실권을 이미 장악한 상황이었기에 쉽게 제어할 수 있고 뚜렷한 정치적 기반이 없는 헌제를 허수아비로 세운 것이었다. 이에 각지의 제후들이 모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했는데, 동탁은 도읍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동탁이 장안 주변에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 헌제는 그저 [[상국]] 동탁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연합군은 맹주 [[원소 (후한)|원소]]를 필두로 하여 헌제를 괴뢰 군주로 규정하고 유주목 [[유우 (후한)|유우]]를 황제로써 추대하고자 했다. 비록 이는 유우의 완강한 거절로 무산되었으나, 이미 원소 등에 의해 황실의 무능함이 낱낱이 성토되었으므로 헌제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각지의 제후들은 황제를 무시하고 제각기 실력 행사를 통해 영토를 지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군웅할거의 시작이다.
 
=== 동탁의 죽음과 이각과 곽사의 난 ===
102번째 줄:
{{전임후임
|전임자=[[후한 소제 (13대)|후한 소제]]
|후임자=[[조비|조위 문제]]<br />[[유비|촉한 소열제]]<br />[[손권|오 대제]]
|직책=[[중국의 황제|중국 황제]]
|임기=[[189년]] [[음력 9월]] [[갑술|갑술일]] ~ [[220년]] [[음력 10월]] [[을묘|을묘일]]
111번째 줄:
 
{{기본정렬:헌제, 후한}}
 
[[분류:181년 태어남]]
[[분류:234년 죽음]]
줄 117 ⟶ 118:
[[분류:삼국지 위나라의 인물]]
[[분류:후한의 제후]]
[[분류:2세기 중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