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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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 165년에 [[명림답부]](明臨荅夫)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가계는 기록마다 서로 상이하며 [[삼국사기]] 내에서도 서로 다른 대목이 있어, 다소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대왕은 [[태조왕]]의 이복 동생이지만 [[후한서]]에 의하면 신대왕은 태조왕의차대왕의 아들이라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그의 아들 [[산상왕]]의 이름이 위궁이며 [[태조왕]]의 증손자라 하여 가계가 서로 맞지 않는다. 위궁을 그의 아들 [[산상왕]]이 아닌 손자 [[동천왕]]으로 비정한다 해도 [[태조왕]]과 그의 관계가 형제가 아닌 부자로 설정해야 맞게 된다. [[신채호]]는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보았다.
 
신대왕은 [[166년]], 좌·우보(左·右輔)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임명하였으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에 [[후한]](後漢)의 현도태수가 침공해 들어와 항복하였으며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ref>이 시기에는 실제 공손도가 요동에 세력을 잡기 이전으로, 이 기록은 오기로 보고 있다. </ref> [[172년]]에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