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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있었으며, 서울지도에 표시만 되어 있고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ref name="서울하천239">{{서적 인용 |저자=이상배 |날짜=2000 |제목=서울의 하천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쪽=239 |isbn=9791160710182 }}</ref>
* 모전교(毛廛橋) : 지금의 모전교 자리에 있었다. 우전다리(隅廛―) 또는 모교(毛橋)라고도 불렸으며,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한 이후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 하다가 영조 때가 되어서야 모전교라고 불리게 되었다.<ref name="서울하천239"/>
* 광통교(廣通橋) : 지금의 광교 자리에 있었으며, [[세종로|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이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 (신덕왕후)|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왕자의 난|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 장통교(長通橋) : 한화빌딩 북쪽, 종로12길 남쪽에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장통교 사진자료로 복원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63986 |뉴스=한겨레 |저자=정혁준 |날짜=2004-06-14 |확인날짜=2016-12-11 }}</ref> 장통방(長通坊)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으며,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장교(長橋)라고도 하였다.<ref name="서울하천241">{{서적 인용 |저자=이상배 |날짜=2000 |제목=서울의 하천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쪽=241 |isbn=9791160710182 }}</ref> 이 다리 서쪽에서 [[창동천]]이 합류하여 [[삼각주|삼각형 모양의 땅]]을 이뤘다.<ref name="서울하천242">{{서적 인용 |저자=이상배 |날짜=2000 |제목=서울의 하천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쪽=242 |isbn=9791160710182 }}</ref>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 광제교(廣濟橋) :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었으며, [[동국여지비고]]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ref name="서울하천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