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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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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활동: 육경,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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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공자가 교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예(六藝)' 또는 '육경(六經)'이라 불리는 '역','시','서','예','악','춘추'이다.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계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 이전에도 육경의 이름들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유가의 계술이 있은 후에야 단순한 점술서, 잡기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춘추'를 비롯한 종래의 사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치관인 정명(正名)론을 끌어내었고 맹자는 이를 '춘추의 대의만은 공자가 은연중에 취했고' 춘추를 정명으로 귀결시키면서 '난신적자를 두렵게'했다고 평하였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노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
 
공자의 만년에 아들인 백어(<ref>혹은 리라고도 한다</ref>)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ref>{{서적 인용|꺾쇠표=예|제목=[[논어|論語]]|장=先進第十一: 9-10장|인용문=顔淵死.子曰,"噫! 天喪予! 天喪予! 非夫人之爲慟而誰爲慟 (안연이 죽었다. 공자 왈,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그 사람(안연)을 위해서 애통해 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는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