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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태'''('''龐孝泰''', [[601년]] ~ [[662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무장이다.
 
백주(白州)<ref>지금의 중국 [[광시 성]](廣西省) [[보바이 현]].</ref> 사람으로 [[623년]] 4월 당의 남주자사(南州刺史)로 있으면서 남월주(南越州) 백성인 저도명(宁道明), 고주(高州) 수령(首领) 풍훤(馮暄) 등과 함께 당에 반역하여, 남월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강주(姜州)를 공격하였는데 합주자사(合州刺史) 저순(宁纯)이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자 방효태는 다시 당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현경 (연호)|현경]](顯慶) 5년([[660년]]) 8월, 당의 [[당 고종|고종]](高宗)은 [[신라]] [[태종무열왕태종 무열왕]]의 요청에 따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총관(神丘道行軍總管)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하였고, 방효태 역시 이때 장군으로써 참전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12월에는 패강도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總管)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이 된 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 [[유백영]](劉伯英) 등을 따라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용삭]](龍朔) 원년([[661년]]) 4월, 방효태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써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總管)으로 임명되었고 [[임아상]](任雅相), 계필하력, 소정방, [[소사업]](萧嗣), 정명진(程名振) 등과 함께 35군을 거느리고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용삭 2년([[662년]]) 2월 18일, 방효태가 거느린 영남(嶺南) 병사들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몸소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사수(蛇水)에서 충돌하였고, 전투 결과는 옥저도행군 전군이 몰살당하는 패배였다([[사수 전투]]). 이때 방효태 역시 함께 참전했던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향년 62세로 전사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구려군의 공격 앞에서 부장들이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였으나 방효태는 "유백영 등이 무슨 수로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또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지금 다 죽었는데, 어떻게 내 몸 하나만 살길 구하겠는가?" 라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