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5번째 줄: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베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의 지지도가 높았고 발행부수도 가장 많았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신채호 등이 있다.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주요 논설의 대부분은 그가 집필했다. [[박은식]],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많이 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을 주도했으며, [[1904년]] 4월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이 신문은 항일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논조를 견지했다. 조선민중들의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간교한 통감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락하기까지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부당성,그리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