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 흐루쇼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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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시절부터 여러 공장과 광산을 전전하며 일했다. 공장에 근무 중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령]]이 떨어졌으나 운좋게 차르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노동자조직]] 가입하여 활발하게 노동운동을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 때 노동조합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우크라이나 지역의 점령을 놓고 [[적군]]과 [[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간에 투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에서는 [[붉은 군대]]에 들어가서 반혁명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파일:NikitaNina.JPG|thumb|left|3번째 아내 니나와 함께 (1922년)]]
=== 소련공산당 활동 ===
[[파일:Joseph Stalin and Nikita Khrushchev, 1936.jpg|thumb|right|[[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한 흐루쇼프]]
1918년에 당원이 되었고, 이후 [[돈바스]]와 [[키예프]]에서 여러 관직과 당직을 거쳤다. 1919년 1월 [[적군]]에 참가하여 하급 정치위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백군과 침입해오는 [[폴란드]]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1921년 동원해제되었다. 퇴역후 심한 [[기근]]으로 첫 부인 갈리나가 2명의 아이를 남겨놓고 병사했다. 1922년 [[유조프카]]에 있는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의 입학을 허가받고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흐루쇼프는 당교육과 이론 교육을 받는 동시에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곧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 학생정치위원이 되었고 소련공산당 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4년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 재직 중 교사인 2번째3번째 아내 니나 페트로브나 흐루쇼바와 재혼했다.
 
1931년 그는 [[모스크바]]로 전근되었고, 1935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가 되었다. 이 자리는 후에 권력핵심으로 통하는 요직이었다. (후에 러시아 대통령이 되는 [[옐친]]도 이곳을 거쳤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주목할 만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