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7번째 줄:
* 해방 이후 초기 적십자사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백상규는 [[대한적십자사]] 재정 확보를 위해 20만평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 해방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이화여중]]이 재정적재정적으로 위기를 겪을어려울 백상규에게 재정적 도움을 청했는데, 이에 백상규는 자신과 아들 소유의 서울 종로구 [[서린동]] 소재의 100만평대 땅을 이화학원에이화여중에 희사했다고 한다.<ref>경향신문 1950년 3월 19일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319003292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3-19&officeId=00032&pageNo=2&printNo=1110&publishType=00020"</ref> 얼마 후 제2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곧 전쟁이 나서 납북된 백상규는 큰 선물을 남긴 셈이다.
 
* [[장단군]] 출신의 대지주로서 [[한국전쟁]] 때 납북된 후 1973년 당시 싯가 3억원 짜리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1가 소재 앵두밭을 두고 가족과 관리인 등 간에 17년에 걸쳐 주인이 10 차례 바뀌는 '해방 이후 최장기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ref>경향신문 1973년 10월 1일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100100329206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10-01&officeId=00032&pageNo=6&printNo=8619&publishType=0002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