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187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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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잠재적 대안자이자 경쟁자였으며,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폐위시키고 [[완은군]], [[흥친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원군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김홍집 내각의 [[내부]][[협판]]·통위사 등에 등용되었고,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1894년]] [[김학우]](金鶴羽) 암살 사건의 배후로 몰려 체포, 투옥 후 고문을 받았으며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 주차[[일본]]공사(駐箚日本公使)와 그해 [[11월 27일]] 육군참장(陸軍參將) 등을 지냈다. 이에 아울러 그는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도사건에도 간접 연루되었지만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다른 대안자와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왕위에 오르려는 시도를 하여 고종을 긴장시켰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교육, 왕위 계승을 단념하고 계몽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12년]] 이희 공으로 강등된 아버지 [[흥친왕]]이 죽자 준(埈)으로 개명한 뒤 공(公)의 지위를 상속받아 '이준 공'(公)이 되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반외세운동과 반정부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이준용은 과단성이 부족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병약한 세자([[대한제국 순종|순종]])를 대제할 수 있는 인물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 자신도 [[청일전쟁]] 중에 고종을 폐위하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1쪽</ref> 이준용은 국가를 다스릴만한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젊은 인재였기 때문에 [[대원군흥선대원군]]과 여러 정치세력들은 그를 계속 신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0~311쪽. </ref> 만년에는 친일적 성향으로 변절했다. [[윤보선]] 가문의 인척으로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은 그의 서녀 [[이진완]]<ref>이준용의 첩 전순혁의 소생으로 그의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ref> 과 결혼했다.
 
==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영선군 이준용은 [[1870년]] [[음력]] [[6월 25일]] [[한성부]] 종로방 운니동의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흥친왕 [[이재면]]과 풍산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경극(景極)이고 뒤에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준용이라 하고 [[호 (이름)|아호]]는 석정(石庭)과 송정(松亭)이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이준 이라는 이름은 [[1913년]] [[9월 20일]]에 개명한 이름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이명복]]은 그의 숙부였고, [[완은군]] [[이재선]]은 배다른 숙부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미성년자였던 숙부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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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청나라]]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내쫓고 이준용을 왕으로 세운 다음, 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우려는 음모를 꾸민다.<ref name="parkyung0450">박영규, 조선의 왕실과 외척 (김영사, 2003) 450</ref>
 
[[1886년]] 고종과 [[명성왕후명성활후]]는 [[갑신정변]] 후부터 더욱 심해진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인 친러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위안 스카이]]에 의해 다시금 고종의 대안자로 고려되었다. [[위안스카이]]는 [[1885년]] [[10월]] [[보정부]]에서 환국한 [[흥선대원군]]과 협의하여 1886년 초부터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세자로 삼아 대원군을 섭정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ref name="oh314">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4쪽.</ref> [[고종]]이 [[러시아]]와 [[미국]]에 기대어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내쫓고 대원군을 내세우는 것이 [[청나라]]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ref name="parkyung0450"/> 그러나 아들을 내쫓고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으므로 대원군의 적장손 이준용을 선택한 것이다.<ref name="parkyung0450"/>
 
[[1886년]] [[한러밀약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원군]]과 협력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ref name="dido1">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70_1_0010666</ref>,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제지로 좌절되었다.<ref name="dido1"/>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수시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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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폐위 기도와 실패 ====
 
[[갑오경장]] 초두에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대한제국 고종|고종]] 폐위의 전초작업으로서 [[명성황후]] 폐서 작업에 착수하였다.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을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하였다.<ref name="ReferenceA">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6쪽.</ref>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이 쉽게 움직이지 않자 그는 사람을 보내 [[일본 공사관]]측과 교섭하며 그들의 지지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은 그의 밀사가 방문했는데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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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그는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부|내무아문]][[협판]]에 임명되었다.<ref name="p317"/>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감시하는 역할을 큰아들 [[이재면]]에게 맡기도, 손자 이준용을 [[종정경]], 친군위통위사 겸 정부 당상, [[내무부|내무아문]] [[협판]]으로 임명한 것이다.<ref>고종 실록, 1894년 7월 15일</ref> 이 중 종정경은 종친의 지도자라는 상징적인 관직이었고, 통위사는 수도의 가장 강력한 군영 중의 하나인 [[통위영]]을 다스리는 총책임자였으며<ref name="p317"/>, [[내무부|내무아문]][[협판]]은 [[내무부]]의 차관으로 전국 지방관을 다스리는 권한과 [[한성부]] 일대의 경찰권에 대한 통수권을 지닌 자리였다.<ref name="p317"/> 이어 [[7월 17일]] [[군국기무처]]가 이준용을 [[군국기무처|군국기무처 의원]]에 차하할 것<ref name="p317"/> 을 고종에게 건의하였다.<ref name="p31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8쪽.</ref> 이 무렵 [[내무부|내무대신]]이 자주 교체되었으므로 [[내무부|내무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그는 사실상 내무대신(장관급)의 역할까지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의 권한 확대를 우려하고 있던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단호한 태도로 윤허하지 않았다.<ref name="p318"/> 바로 그는 [[일본]]주차 전권공사(日本駐箚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은 [[7월 19일]]에 이준용을 내무대신서리에 임명하여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하였다. 이 무렵 내무대신이 자주 교체되었으므로 그는 내무대신(장관급)의 역할까지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ref name="p318"/><ref>뮈텔, 《뮈텔 주교 일기》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86) 314~315pp</ref> 고종과 민씨 세력의 견제와 감시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는 비밀리에 [[동학 농민 운동|동학 농민군]]측에 사람을 보내 정보를 주고 받았다.
 
==== 2차 추대 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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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청에 와서도 이준용은 갖은 고문과 폭행을 당하였다.<ref name="pok1"/> 이를 기회삼아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제거하려 한다.
 
감옥에 수감된 뒤에도 그는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ref name="p321"/> 또한 민씨 세력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형문을 가장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타고난 체력 덕에 그는 끝까지 버티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를 [[김학우]] 암살 사건의 배후라 단정한 일부 개화세력은 대원군을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이준용을 사형시키려 하였다.
 
==== 수감과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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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집행 감형과 유배 ====
이준용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던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나와 민가에서 농성을 벌이며 민심의 호응을 얻으려고 하였다.<ref name="pok1"/> 일본인들이 간행하던 '한성신보'에는 이준용 사건을 경무청 발표대로 보도하면서 정부의 강경조치를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ref name="pok1"/> [[흥선대원군]]은 어떤 대가를 주고서라도 손자를 구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와 각국 공사들을 찾아가 절박한 부탁을 하였고<ref name="p321"/>, 대원군의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와 각국 공사들은 이준용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호소하였다.<ref name="p321"/> 당황한 외교사절단이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이노우에 일본 공사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준용을 석방<ref name="pok1"/> 케 하라고 하였다. 이준용에 대해서는 내무대신 [[박영효]]와 법무대신 [[서광범]]이 극형설을 주장하였지만 감형설이 통과되어, 사형에서 형이 감량된다.
 
[[1895년]] [[4월 19일]] 특별법원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ref name="han2430">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ref> 다. 이 기간 중 이준용은 재판과 고문에 시달림당했다. [[흥선대원군]]은 계속 손자인 그의 석방을 위해 교섭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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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순헌황귀비|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순헌황귀비|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순헌황귀비|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ref name="oh327"/> [[순헌황귀비|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의민태자|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ref name="oh32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쪽.</ref>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oh328"/>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 3차 추대 쿠테타 시도와 좌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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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7일]] [[김옥균]]에게 [[충달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날 김옥균 시호 추증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ref>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 지음 출판사 푸른역사 | 2005) 109페이지</ref> 의 한사람으로 [[김옥균]] 연시연 식장에 참석했다. [[김옥균]]의 복권과 시호 기념식에 일시적으로 참석한 뒤 그는 영구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퇴위한 뒤에도 고종은 그를 의심, 경계했고, 잠재적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려 노력했다. [[8월 13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특명으로 죄명이 삭제되었다.
 
[[1907년]] [[8월 14일]] 종일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장군|참장]](參將)이 되었으며, [[9월 12일]] 영선군(永宣君)의 작위를 받았다. [[11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과 [[일본]]파견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된 아버지 [[흥친왕]]을 수행하여 보빙대사수행원의 직책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대한제국 순종|순종]]은 그를 복권시켰지만, 내심 그를 경계하였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후사가 없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ref name="ReferenceB"/><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ref>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ref name="ohsy333"/> [[의화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ref name="ohsy334">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ref>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의친왕|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ref name="ohsy334"/>
 
그해 [[12월]]에 이화 대수장(李花大綏章) [[1908년]] [[9월]] 서성 대수장(瑞星大綬章)을 차례로 수여 받았다. [[1908년]] 연흥사의 건립에 동참한다. 연흥사는 1908년경 절골(寺洞)에 개장된 극자으로 영선군 이준용과 중추원 고문 이지용이 함께 건립한 것<ref>우리들의 잃어버린 신명:전통극 (허은 지음 출판사 교보문고 | 1999) 169</ref> 이다. [[1908년]]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이 총재로 있는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총고문에 선출되었다. [[1909년]] [[12월]] 중구 전동(典洞) 등지에서 [[유길준]]을 대표로 하는 상무조합(商務組合)의 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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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ince Yi Wu 01.jpg|thumb|right|180px|양자 [[이우]]<br />(사촌동생 [[의친왕]]의 차남)]]
 
만년에는 병석에 누워서 살다시피 했다. [[1915년]] [[5월 20일]]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친히 [[일본군]] [[3성 장군|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11일]] 병으로 [[금강산]]으로 요양을 갔고, 육군 중장직을 사퇴하였다. 그의 부인 김씨 역시 [[1915년]] [[6월]] 병을 앓아 [[조선총독부]]가 특별히 병원에 입원하고 일본인 의사와 佐藤라는 성의 전담 간호사를 배치해주었다. [[1915년]] [[8월]]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500원을 기부하였다.
 
아들이 없던 그는 [[1916년]] 첩인 [[전순혁]](全順爀)이 회임하자 아들을 기대하였으나, [[1916년]] [[5월 18일]] 그에게서 딸 [[이진완]](李辰琬)을 보았다. 당시까지도 딸의 이름을 짓지 않는 일이 보통이었지만, 그는 서녀 딸이 태어나자 직접 딸의 이름을 진완이라 지었고,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던 첩 전씨에게 순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또한 이준용은 특별히 요청하여 첩 전순혁의 거처를 운현궁 근처에 마련해주고, 그 거처에 경위대를 배치하고 일지를 기록하게 했다. 결국 아들이 없어 [[1917년]]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고<ref>그의 부인 광산 김씨가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의친왕]]을 찾아가 부탁한 것에 의해서였다고 한다.</ref>, [[1917년]] 양력 [[3월 22일]](음력 2월 29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였다. 이에 양자 이우가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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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용을 연기한 배우 ==
* 확인중[[김광영 (배우)|김광영]] - 《[[명성황후 (드라마)|명성황후]]》, [[2001년]] - [[KBS]] 드라마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