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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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元帥) [[조충 (고려)|조충]](趙冲)이 열병하던 중 이것을 보고 놀라 그 까닭을 물어보고는 내상(內廂)으로 불러들여 중용했다.<ref name=a>『고려사』 「김지대전」</ref>
 
[[1219년]](고종 6) 조충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문과를 주관했는데, 이 때 김지대가 장원으로 급제했다.<ref name=b>『고려사』 「선거지」</ref> 전례에 따라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자,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강호(强豪)들을 억눌렀으며, 적발하는 것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그를 경외했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벼슬을 받았다가 후에 다시 외직인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되었다.
 
[[1240년]](고종 27) 진도(珍島)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항 (고려 무신)|만전]](萬全)이 한 사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의 문도들이 횡포를 자행했다. 그 중 통지(通知)라는 자가 제일 심했는데, 김지대는 처음에는 그의 청탁을 모두 거부했다가, 직접 만전을 만나 몇 개는 즉석해서 해결해 주고 나머지는 행영(行營)으로 돌아간 후 통지를 만나면 해결하겠다고 보류했다. 과연 행영으로 돌아온 후 통지가 찾아오자, 그를 결박하여 죄를 묻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에 만전은 김지대에게 감정을 품었으나, 그가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허물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해치지 못했다.<ref name=a/>
전례에 따라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자,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강호(强豪)들을 억눌렀으며, 적발하는 것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향리와 백성들이 그를 경외했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벼슬을 받았다가 후에 다시 외직인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되었다.
 
[[1240년]](고종 27) 진도(珍島)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항 (고려 무신)|만전]](萬全)이 한 사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의 문도들이 횡포를 자행했다.
 
그 중 통지(通知)라는 자가 제일 심했는데, 김지대는 처음에는 그의 청탁을 모두 거부했다가, 직접 만전을 만나 몇 개는 즉석해서 해결해 주고 나머지는 행영(行營)으로 돌아간 후 통지를 만나면 해결하겠다고 보류했다.
 
과연 행영으로 돌아온 후 통지가 찾아오자, 그를 결박하여 죄를 묻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에 만전은 김지대에게 감정을 품었으나, 그가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허물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해치지 못했다.<ref name=a/>
 
[[1243년]](고종 30)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최린 (고려)|최린]](崔璘)과 함께 몽골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고<ref name=c>『고려사』 「고종세가」</ref>, [[1255년]](고종 42)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곽예|곽왕부]](郭王府)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ref name=b/>
 
[[1258년]](고종 45) 5월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煕)가 여색을 즐기고 군무를 돌보지 않아 그 지방의 민심이 떠나자, 조정에서 당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있던 김지대를 재략(才略)이 있다 하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시키고 진(鎭)으로 나가게 했다. 김지대가 은혜와 믿음으로 민심을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ref name=a/>
 
김지대가 은혜와 믿음으로 민심을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ref name=a/>
 
11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ref name=c/>, [[1260년]](원종 원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를 차례로 거쳤다.<ref name=a/>
 
11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ref name=c/>, [[1260년]](원종 원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를 차례로 거쳤다.<ref name=a/> 이듬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정겸(鄭謙)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고<ref name=b/>, 얼마 되지 않아 퇴직을 청하자, 수태부(守太傅)·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더해지고 치사(致仕)했다.
 
[[1266년]](원종 7) 병이 들자 머리를 깎고 앉은 채 77세로 졸했으며, 영헌(英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f na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