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4 바이트 추가됨, 2년 전
편집 요약 없음
보통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해 왔으나,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지 않는 성씨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몇몇 성씨는 시조의 본적지보다는 씨족의 발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한 왕으로부터 성을 받을 때(사성) 본관도 함께 받은 사례가 많아, 시조의 본적지와 본관이 다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관은 씨족의 발상지로 봐야 타당하다.<ref name='ksh' />
 
현재 한국에는 286개 성씨와 4179개4,179개 본관이 파악되고 있다([[통계청]] 2000년 인구센서스). 본관도 주요 성씨와 마찬가지로 거대 씨족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해서 김해 김씨가 9.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를 차지한다. 반면 1000명1,000명 미만의 본관도 66%가 넘고, 198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본관도 [[한양 강씨|한양 강(姜)씨]], [[장지 김씨|장지 김(金)씨]] 등 15개 성관(姓貫)이나 된다.<ref name='ksh' />
 
한국의 본관은, 삼국유사의 신라 6부족을 예로 들며, [[신라]]시대부터 본관이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씨족 시조의 태생(본적)을 거론하며 드는 예로 볼 뿐이고, 한국의 본관제도가 시작된 때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지방 호족들이 발흥을 하면서부터라는 설이 정설이다. 즉, 신라 말에 중앙집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확립하고, 그것이 성씨제도와 연결되면서 씨족의 발상지가 되었고, 그 발상지가 본관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ref name='ksh' />
 
본관제도가 정착된 다른 이유는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고려]] 초의 통치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지방 호족을 회유하고 연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조 23년경에23년 경에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군현제 개편과 토성분정(土姓分定) 사업을 시행하였고, 광종조에서 호족 정비책, 성종조에서 지방제도 정비책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본관제도가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 유력 토성(土姓)의 수장에게 행정실무를 맡겼으며, 심지어 일부 군현은 지방의 토성이 ‘호장’직을‘호장’ 직을 세습하며 징세와 지방행정 관리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본관의 양민(백성)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었고, 이전했다가 발각되면 본관으로 되돌려졌다.
 
이처럼 본관의 정착 시기가 주로 신라 말 고려 초이다보니, 대부분의 본관이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ref name='ksh' />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