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흥: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3번째 줄:
본관은 [[청주 경씨|청주]](淸州)이다. 부원파(附元派)를 제거하고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초명은 '''경천흥'''(慶千興)이며 그의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을 지낸 경사만(慶斯萬)이다.
 
[[1352년]] [[음서]]로 관직에 등용되어 감찰 장령 등을 거쳐 [[1354년]] ([[공민왕|고려 공민왕]] 3년) 군부판서(軍簿判書) [[1357년]]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가 되었다. 이때 왜구가 빈번히 침입해오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都城) 수축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 유숙(柳淑) 등과 함께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1359년]]에는 [[기철]](奇轍)등 부원파 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졌으며 서북면원수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1364년]] 1월 원이 [[고려]] 왕으로 임명한 [[덕흥군 (고려)|덕흥군]](德興君)을 앞세우고 최유(崔濡)가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순(李珣) [[최영 (고려)|최영]](崔瑩) 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좌시중(左侍中)에 올랐다. [[1365년]]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었다파직되었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 안우경 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흥주(興州)로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살해되자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
 
그 후 문하시중을 거쳐 [[1377년]]([[고려 우왕|우왕]] 3)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까지 쳐들어온 왜구에 대비했다. [[1380년]], [[술]]을 마시고 회의에 참석 안 했다는 이유로 [[이인임]], [[임견미]] 등에게 쫓겨나 [[청주시|청주]]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