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6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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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의 촌장들은 처음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온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 형산(兄山)에 내려온 고허촌장 [[소벌도리]]<ref>당시 6부의 촌장들 중 소벌도리가 가장 연장자였던 것으로 전해온다.</ref>(蘇伐都利), 화산(花山)에 내려온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이산(伊山)에 내려온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온 가리촌장 [[지타]](祉陀),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온 고야촌장 [[호진]](虎珍, 설거백)을 말한다.
 
== 6촌6촌의 근거지 ==
===알천<ref>다른 촌은 모두 산 밑에 있는데, 양산촌만 알천이라는 물가에 있어 살기도 가장 좋고 인구도 많아 중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양산촌===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ref>대한민국 성씨 구성에서도 양산촌의 [[이씨]], 고허촌의 [[최씨]], 진지촌의 [[정씨]]가 5대성에 들어간다.</ref><ref>신라가 고대국가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차츰 밀려난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사람들이 밀양, 성산, 경산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진지촌 사람들도 영일, 동래 등지로 산거하게 된다.</ref>
촌장은 [[알평]]이고, 양산촌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고려시대의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一曰閼川楊山村南今曇嚴寺長曰謁平初降于瓢嵓峯 是為及梁部李氏祖{{할주|奴礼王九年置名及梁部夲朝太祖天福五年庚子改名中興部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을 알평이라 일컬으며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곧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할주|노례왕 9년(서기 32년)에 급량부라는 이름의 부(部)를 두었는데 본조(本朝)의 [[:w:고려 태조|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庚子年, 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현재의 *경주시 동방(東方), 인왕(仁旺), 구황(九黃), 노동(路東), 노서(路西), 동부(東部), 성동(城東), 성건동(城乾洞) 일대.
 
*===돌산 고허촌===
* 양산촌
첫째는 알천<ref>다른 촌은 모두 산 밑에 있는데, 양산촌만 알천이라는 물가에 있어 살기도 가장 좋고 인구도 많아 중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의 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 촌장은 [[알평소벌도리]]이고,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왔다. 이 분이 곧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셨다. 32년에 급량부라는 이름의 부를 두었는데 940년에 중흥부라고 고쳤다. 고려시대의 파잠구량벌(波潛仇良伐) ·동산 마등오(東山麻等烏) ·피상 도북(彼上道北동촌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閼川楊高墟南今曇嚴寺長曰謁平蘇伐都利初降于瓢嵓峯 兄山是為梁部李氏祖{{할주|奴礼王九年置名及部夲朝太 讀云道或作涿亦音道}}鄭氏天福五年庚子改名中興部波潛東今曰南彼上東部仇良伐麻等烏道北迴徳等南}}{{할주|称今曰者 太祖 所置也下例知}}”(첫째는둘째는 알천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돌산고허촌이니 촌장을 알평이라소벌도리라 일컬으며일컫으며, 처음에 표암봉에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곧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사도부{{할주|노례왕‘梁’을 9년(서기‘도’로 32년)에읽는다. 급량부라는또는 이름의‘涿’이라 부(部)를쓰지만 두었는데역시 본조(本朝) [[:w:고려‘도’이다. 태조|태조]]}} 천복(天福)정씨의 5년조상이 경자년(庚子年,되었다. 940년)에지금은 이름을 고쳐 중흥부남산부(中興南山部)라 하였다.일컫는데 구량벌 파잠(波潛)·동산(東山) 마등오 ·피상(彼上) 도북·동촌 회덕 등 남촌(村)이 여기에 속한다. {{할주|‘지금은 ~라 일컫는다’고 하는 것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ref>
현재의 *경주시 배동(拜洞),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斗西), 두동면(斗東面) 일대.
 
*===취산 진지촌===
현재의 경주시 동방(東方), 인왕(仁旺), 구황(九黃), 노동(路東), 노서(路西), 동부(東部), 성동(城東), 성건동(城乾洞) 일대.
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촌이다. 촌장은 [[지백호]]이고 고려시대의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四曰觜山珎支村{{할주|一作賔之又賔子又氷之}}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是爲夲彼部崔氏祖今曰通仙部柴巴等東南村屬焉”넷째는 취산진지촌{{할주|빈지, 빈자 또는 영지라고도 한다}}이니, 촌장을 지백호라 일컫는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일컫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ref>
현재의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외동읍(外東邑) 일대.
 
===무산<ref>무산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건천읍]] 일대 곳곳에 남아 있다.</ref> 대수촌<ref>[[건천읍]] 일대로 지금도 대수촌이라 부른다.</ref>===
* 고허촌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다. 촌장은 [[소벌도리구례마]]이고, 처음에고려시대의 형산에박곡촌(朴谷村) 내려왔다. 서촌(西村)<ref>조선시대에 분이경주부일 사도부 최씨(삼국사기는서면이라 최씨했고, 삼국유사는건천면으로 정씨로있다가 기록)의지금은 조상이건천읍이 되셨다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를 남산부라고 고쳤다. 고려시대의 구량벌(仇良伐) · 마등오(麻等烏) ·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ref>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高墟大樹村長曰蘇伐都利俱 {{할주|一作仇}}禮馬初降于{{할주|一作皆比山}}是為{{할주|梁 讀云道或作涿亦音道}}部又牟梁部孫祖今曰南山云長福仇良伐麻朴谷村烏道北迴徳等南西”(셋째는 무산대수촌이니 촌장을 구례마(俱禮馬 {{할주|称今曰者 太祖또는 所置也下例知仇禮馬}}”(둘째는)라 돌산고허촌이니일컫는다. 촌장을 소벌도리라처음에 일컫으며이산(伊山,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사도부{{할주|‘梁’을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도’로한다}})에 읽는다.내려왔으니 또는이는 ‘涿’이라 쓰지만 역시 음점량부(音)은漸梁部 ‘도’이다.{{할주|또는 漸涿部}}) 정씨의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장복부라 일컫는데, 구량벌 · 마등오 · 도북· 회덕박곡촌남촌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할주|‘지금은 ~라 일컫는다’고 하는 것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ref>
현재의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일대.
 
*===금산 가리촌===
현재의 경주시 배동(拜洞),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斗西), 두동면(斗東面) 일대.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다. 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기타)이다. 처음에고려시대의 명활산에금강산 내려왔다.백률사의 북쪽 분아 한기부 배씨의 조상이 되셨다산이다. 고려시대에 이를 가덕부라고 고쳤고,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上下西知) ·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五曰金山加里村{{할주|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長曰祗沱{{할주|一作只他}}初降于明活山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裴氏祖今云加徳部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다섯째는 금산가리촌{{할주|지금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이니, 촌장을 기타{{할주|지타라고도 한다}}라 일컫는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왔으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 일컫는데, 상하서지 · 내아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현재의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양남(陽南). 양북면(陽北面) 일대.
 
*===명활산 고야촌===
* 진지촌
셋째는촌장은 취산의[[호진 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신라)촌이다. 촌장은 [[지백호|호진]]이고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다이다. 고려시대의 분이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旀村) 본피부· 정씨궐곡(삼국사기는 정씨閼谷, 삼국유사는또는 최씨로 기록갈곡(葛谷))의 조상이 되셨다. 고려시대에 통선부라고 고쳤다. 고려시대의 시파동남촌이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 明佸珎支 髙耶{{할주|一作賔之又賔子又氷之}} 長曰智伯 初降于 金剛 是爲夲彼習比氏祖今曰通仙臨川柴巴等東南 勿伊村 仍仇旀屬焉”넷째는 취산진지촌闕谷{{할주|빈지,一作 빈자 또는 영지라고도 한다葛谷}}이니 等東北村屬焉”(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촌장을 지백호라호진이라 일컫는다. 처음에 화산에금강산으로 내려왔으니, 이는습비부 본피부 최씨의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일컫는데임천부인데, 시파(柴巴)물이촌 ·잉구미촌 · 궐곡{{할주|갈곡이라고도 한다}}동남촌이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화산(花山), 물천(勿川) 동산리(東山里), 안강읍(安康邑) 일대.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ref>대한민국 성씨 구성에서도 양산촌의 [[이씨]], 고허촌의 [[최씨]], 진지촌의 [[정씨]]가 5대성에 들어간다.</ref><ref>신라가 고대국가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차츰 밀려난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사람들이 밀양, 성산, 경산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진지촌 사람들도 영일, 동래 등지로 산거하게 된다.</ref>
현재의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외동읍(外東邑) 일대.
 
* 대수촌
넷째는 무산<ref>무산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건천읍]] 일대 곳곳에 남아 있다.</ref>의 대수촌<ref>[[건천읍]] 일대로 지금도 대수촌이라 부른다.</ref>이다. 촌장은 [[구례마]]이고 처음에 이산에 내려왔다. 이 분이 점도부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셨다. 고려시대에 이를 장복부라고 고쳤다. 고려시대의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ref>조선시대에 경주부일 때 서면이라 했고, 건천면으로 있다가 지금은 건천읍이 되었다.</ref>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三曰茂山大樹村長曰俱 {{할주|一作仇}}禮馬初降于伊山{{할주|一作皆比山}}是為漸梁{{할주|一作涿}}部又牟梁部孫氏之祖今云長福部朴谷村等西村屬焉”(셋째는 무산대수촌이니 촌장을 구례마(俱禮馬 {{할주|또는 仇禮馬}})라 일컫는다. 처음에 이산(伊山, {{할주|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는 점량부(漸梁部 {{할주|또는 漸涿部}})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 일컫는데, 박곡촌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현재의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일대.
 
* 가리촌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다. 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기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왔다. 이 분아 한기부 배씨의 조상이 되셨다. 고려시대에 이를 가덕부라고 고쳤고,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上下西知) ·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五曰金山加里村{{할주|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長曰祗沱{{할주|一作只他}}初降于明活山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裴氏祖今云加徳部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다섯째는 금산가리촌{{할주|지금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이니, 촌장을 기타{{할주|지타라고도 한다}}라 일컫는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왔으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 일컫는데, 상하서지 · 내아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현재의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양남(陽南). 양북면(陽北面) 일대.
 
* 고야촌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촌장은 [[호진 (신라)|호진]]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다. 이 분이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셨다. 고려시대에 이를 임천부라고 고쳤고, 고려시대의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旀村) · 궐곡(閼谷, 또는 갈곡(葛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ref>[[일연]](1281), 《[[:s:삼국유사|삼국유사]]》 〈[[:s:삼국유사/권제1|권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條 “六曰 明佸山 髙耶村 長曰 虎珎 初降于 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今臨川部 勿伊村 仍仇旀村 闕谷{{할주|一作 葛谷}} 等東北村屬焉”(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인데, 촌장을 호진이라 일컫는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으니,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인데, 물이촌 ·잉구미촌 · 궐곡{{할주|갈곡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ref>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화산(花山), 물천(勿川) 동산리(東山里), 안강읍(安康邑) 일대.
 
== 신라 6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