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브랑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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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662년 브랑엘의 초상화
|태어난 곳 = [[스웨덴 제국]] [[웁살라]]
|죽은 곳 = [[스웨덴 제국]] [[뤼겐 섬]]
|종교 =
|복무 = {{국기그림|스웨덴|해군}} [[스웨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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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육군 원수]]
|근무 = [[스웨덴 육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 [[30년 전쟁]] <br/ > [[토르스텐손 전쟁]] <br/ > [[브레멘 전투]] <br/ > [[제2차 북방 전쟁]] <br/ > [[스코네 전쟁]]
}}
'''칼 구스타프 브랑엘'''({{llang|sv|Carl Gustaf Wrangel}}, 1613년 12월 23일 ~ 1676년 7월 5일)은 [[스웨덴]]의 귀족이자 [[30년 전쟁]], [[제2차 북방 전쟁]], [[스코네 전쟁]]에서 활약한 뛰어난 군인이었다. 발트 해 독일인으로써, 그는 1646년부터 독일 내에서 스웨덴군의 사령관직을 맡았고, 1657년부터 스웨덴의 제독이 되었다. 브랑엘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총독으로 지냈으며 1664년부터 스웨덴 의회의 주요 인원으로 참석했다.<ref name=Asmus195>Asmus (2003), p.195</ref><ref group=habenhusen>In 1666, he was still addressed Count of Salmis in the treaty of Habenhausen: "Carl Gustav Wrangel / dero Königl. Maytt. und Reiche Schweden Rath / ReichsMarsch / wie auch General-Stadthalter in Pommern / und OberLandtRichter in Uplandt / Graff zu Salmis / FreyHerr zu Lindenberg und Lüdenhoff / Her: zu SchogKloster / BremerVöhrde / Wrangelsburg / Spieker / Eckebyhoff und Greiffenberg". {{cite web|url=http://www.eha.ee/plakatid/show_img.php?id=1104&file=1104_002.png |title=FriedensSchluss, Welcher Zwischen Dero Königl. Maytt. zu Schweden u. PLENIPOTENTIARIO, Und ReichsFeldtHerrn, (tit.) Herrn Carl Gustav Wrangels Hoch-Gräflicher Excellentz, Eines, und Herrn Burgermeisteren, Rath, und gemeiner Burgerschafft der Stadt BREMEN, Anderen Theils, gemachet ist im HauptQuartier zu Habenhausen, für Bremen, den 15. Novembris, Anno 1666 |publisher=Ajalooarhiiv. The Estonian Historical Archives. |pages=2 |language=Eesti, German |accessdate=15 December 2009 |location=Tartu |deadurl=yes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10720125133/http://www.eha.ee/plakatid/show_img.php?id=1104&file=1104_002.png |archivedate=20 July 2011 |df= }}</ref> 1658년 브랑엘은 [[우플란드]]에서 최고 재판관이었으며,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의 고문관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 [[브랑겔스부르크]]라는 도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칼 10세 구스타브]]의 절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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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크리스티나 여왕 ===
20세가 되던 해, 칼 구스타프 브랑엘은 [[30년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년 후 그는 소령에서 1638년 중령으로 진급하며 독일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1644년 [[토르스텐손 전쟁]] 동안 그는 10월 23일 [[덴마크-노르웨이]]의 해군을 페흐마른에서 격파하기도 했다. 이후 1646년 그는 독일로 돌아와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뒤를 이어 독일 주둔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ref name=AsmusTenhaef69>Asmus&Tenhaef (2006), p.69</ref> 브랑엘과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튀렌 자작]]의 프랑스-스웨덴 연합군은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로 진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1648년 30년 전쟁 종결 이후 그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총독이 되었다.<ref name=AsmusTenhaef70>Asmus&Tenhaef (2006), p.70</ref> 크리스티나 여왕은 그에게 살미의 백작이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 칼 10세 구스타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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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Authority control}}
{{기본정렬:브랑엘, 칼 구스타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