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복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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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과 죽음 ====
백제 지도층 내부에서는 이미 발족 초기부터 알력이 끊이지 않았는데, 부여풍이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복신은 승려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까지 차지하여 모든 병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복신의 옆에서 풍왕은 그저 제사만 주관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차 벌어지면서, [[풍왕]]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했다끔살당했다.<ref>《일본서기》에 따르면 서기 663년 6월의 일이었다.</ref>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진 채 [[젓갈]]이 되었다 한다.<ref>《구당서》는 복신이 먼저 풍왕을 죽이기 위해 병을 핑계로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풍왕에게 엄습당해 죽었다고 했으나, 《일본서기》는 풍왕이 먼저 복신을 의심해서 그를 잡아 죽였다고 했다. 단재 [[신채호]]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택함에 1) 모든 군권을 장악한 복신이 실권 없는 풍왕을 당장에 죽이지 않고 동굴에 누워있다가 문병 오기를 기다려 죽이려고 했다는 점, 2) 《일본서기》에서 복신의 사망시점으로 지목한 6월 직후인 7월에 [[당나라]]군이 백제 부흥군을 공격해 여러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는 점, 3) 각처의 성책이 거의 다 함락된 절박한 상황에서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다는 점 등, 세 가지를 들어 《구당서》의 오류를 지목하고 있다.(조선상고사)</ref>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