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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태조]]는 즉위하자마자 관제를 제정했는데, 이때 경연관도 늘렸다. 하지만 경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대학연의》를 진강토록 했던 것이 경연의 역할을 대신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의 뒤를 이은 [[조선 정종|정종]]은 경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 태조의 양위 바로 이틀 후에 경사에서 국사에 관련된 것을 가려 모으게 지시했고, 지사 하윤(河崙)등에게 명하여 “《사서(四書)》를 관람하고자 하니 구절(句節)에 점(點)을 쳐서 바치라.”<ref>《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9월 17일 기축(己丑)일 조</ref>고 지시하는 등 초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또한 정종은 당시
정종은 즉위 초에는 사관(史官)의 경연 입시를 거부했지만<ref>《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12월 9일 신해(辛亥)일 조</ref>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의 입시를 재차 청하자, 입시를 윤허하여 비로소 사관이 경연에 입시하게 되었다<ref>《정종실록》 권1 정종 원년 1월 7일 무인(戊寅)일 조</ref>. 이때부터 사관의 입시를 통해 조선의 경연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이러한 세종은 세자로 책봉되자 서연을 열게 되고<ref>《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6월 20일 기해(己亥)일 조</ref>, 책봉 두 달 만에 태종이 양위함에 따라 보위에 오른다. 이후 [[집현전]]을 설치하는 등 경연에 관심을 보였으나, 말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경연을 열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때는 경연을 대신하여 서연을 중시하였다.<ref>《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 6월 23일 병오(丙午)일 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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