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시나트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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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기회는 1940년 토미 도시 밴드와 함께함으로써 찾아왔다. 시나트라보다 열 살이 많았던 토미 도시는 뛰어난 트럼본 연주자이자 천부적 사업 능력을 겸비한 스타 제조기였다. 시나트라는 “토미는 노래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시나트라는 미국 음악계 레이더에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으며, 추종자들도 나타났다. 당시 그가 불렀던 노래 중 〈I'll Never Smile Again〉은 12주 동안 인기 순위를 석권하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ref name=":2" />[[파일:Frank_Sinatra_by_Gottlieb_c1947-_2.jpg|섬네일|1947년의 시나트라]]
 
미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밴드와 거의 3년을 보낸 시점에서 시나트라는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곧 행운이 찾아왔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손꼽히는 콘서트 홀이자 영화관인 파라마운트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례없는 여성 인파가 극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 일주일 예정된 공연은 한 달, 두 달 연장되었다.<ref name=":2" />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서의 십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때 졸도한 소녀들 가운데는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는 보도가 이어져 ‘흠집’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ref name=":4" /> 19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청소년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ref name=":4" />
 
현대의 ‘팝 히스테리’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명의 청소년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나중에는 단축되어 ‘목소리’)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ref name=":4" />
 
1942년 즈음 그의 입지는 미국인의 우상으로, 존경받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확립되어 있었다.<ref name=":0" /> 드디어 1944년에 그의 첫 음반이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나왔다. 〈Saturday Night〉, 〈Embraceable You〉, 〈She's Funny That Way〉 등 열일곱 곡이 수록되었다. 그는 계속 성공나갔고, 함께 일하는 매니저도 늘어났다. 특히 작사가인 새미 칸과 작곡가인 줄 스타인은 이후 계속 히트곡을 만들면서 시나트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ref name=":2" />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에 록 뮤직이 침투하여 일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록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자, 즉각 위기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여 록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는 19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록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ref name=":4" /> 하지만 록의 위용이 의외로 거세다고 판단, 곧 입장을 수정했고 1960년 TV 프로그램에서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ref name=":4" />
1971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지만 1973년 은퇴를 번복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1981년 당시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행해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호화 휴향지 선시티에서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공연을 펼쳐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동료 및 후배 가수들과 만든 듀엣 앨범 《Duets》(1993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2위)와 《Duets II》(1994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9위)를 출시했다. 199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f name=":3" />
 
시나트라는 소속 레코드사인 캐피톨을 떠나 1961년 리프라이즈 레코드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았으나 2년 뒤인 1963년 회사를 대기업인 워너브라더스에 팔아넘겼다.<ref name=":4" /> 1971년 은퇴를 공식 선언했지만 1973년 은퇴를 번복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1981년 당시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행해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남아프리카공화국가 호화만든 휴향지초호화판 선시티에서휴양지인 고액의선시티의 출연료를공연 받고개막식에 공연을리자 펼쳐미넬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특별무대를 가졌다. 그는 9일간 여기에 출연하는 대가로 1백 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고,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받았다.<ref name=":4" /> 1990년대에는 동료 및 후배 가수들과 만든 듀엣 앨범 《Duets》(1993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2위)와 《Duets II》(1994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9위)를 출시했다. 199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f name=":3" />
 
== 영화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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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트라는 《오션스 일레븐》(1960)으로, '랫 팩' 친구들인 딘 마틴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피터 로포드, 조이 비숍과 함께 신나게 만들어 댄 일련의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처음에 '랫 팩'을 창단했던 험프리 보가트는 시나트라에게 '위원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이 배우들 패거리가 스크린 밖에서 벌인 기행은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연예계 뉴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1970년에 아카데미는 그에게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여했다.<ref name=":0" />
 
== 정치 활동 ==
그는 사업운영에 있어서 간혹 정계와 손을 대기도 해 논란을 빚었으며 1972년에는 경마장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의회의 범죄색출위원회에 출두, 신문의 톱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스캔들은 8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마피아와 밀월관계에 있었으며,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시나트라와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ref name=":4" />
 
그는 정당과 관련하여 애초 40년대에는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개혁지향적인 민주당 쪽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진보파인 민주당후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지지했으며 루즈벨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따 자기 아들의 이름을 프랭클린 웨인 시나트라로 짓기도 했다. 1947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할 정도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74년 미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안드레오티 수상을 환영하기 위해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베푼 백악관의 만찬석상에 출연, 노래를 불렀다.<ref name=":4" />
 
== 사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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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낸시 시나트라]](딸)
* ''[[His Way, Our Way]]'' (헌정 음반)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