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밀은 21년 동안의 교제 끝에 1851년 해리어트 테일러와 결혼했다. 해리어트는 그들이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유부녀이었고, 따라서 그녀의 첫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정신적으로만 가까웠다. 해리어트는 명석한 여성으로, 밀에게 친구로서나 아내로서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밀이 해리어트와 친분을 쌓으면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이 더욱 강해졌다. 『[[자유론]]』은 그녀가 죽은 직후에 출간되었는데, 그녀의 영향 아래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여성의 예속』에서도 해리어트의 영향은 암시적으로 언급된다. 해리어트는 밀과 결혼한 지 겨우 칠년이 지난 1858년, 밀이 동인도회사에서 사직하고 모처럼 자유롭게 둘이서 프랑스를 여행하던 도중에 아비뇽에서 폐충혈로 사망했다. 밀은 해리어트를 거기에 묻고, 조그만 집을 사서 여생의 안식처로 삼았다.
 
밀은 1865년에서 1868년까지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학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기간동안에 런던 웨스터민스터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원에서 그는 주로 자유당과 연결되어 활동했는데, [[아일랜드]]의 부담을 덜어주자고 주장했고, 여성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비례대표제, 노동조합, 농지의 협동조합식 조직 등, 각종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1869년에는 의회 안에서는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정부론』에서는 [[비례대표제]], [[선호이전식 투표제선호투표제]], 참정권 확대 등, 의회와 투표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버트런드 러셀]]이 1872년에 태어났을 때, 러셀의 모친은 밀에게 대부를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그렇게 되었다.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1873년에 사망했고, 아내 곁에 묻혔다.
 
== 사상 및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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