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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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나라]]는 열강의 침략적인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으로 여지없이 약체를 드러냈으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漢人)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 [[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했을 뿐, 사회, [[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한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구체제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운동'의 지도자에게 물려주었다.
 
== 양무운동과 양무파 관료의 성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