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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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부는 [[1925년]] 7월 중앙행정위원회가 [[이상룡]](李相龍)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추천한 것을 계기로 [[1925년]] 말 무장투쟁파와 자치파가 대립하여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가 갈등하면서 분규에 휩쓸렸다. 이에 [[1926년]] 1월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이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였는데, 청년층 무장단들인 무장투쟁파 세력이 자치파 세력을 밀어내고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전만통일회]]에서 제정된 기존의 헌장을 폐지하고 5장 제58조로 된 새 헌장을 제정·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정의부를 창설한 원로급 인사들인 [[양기탁]], [[고할신]](高豁信), [[현정경]], [[오동진]] 등은 [[1926년]] 4월 길림에서 국내의 천도교 혁신파 대표, 형평사(衡平社) 대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노령지역의 대표 등과 회합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고, 경상도 출신의 [[김동삼]], [[김원식]](金元植), [[이광민]](李光民) 등은 [[김응섭]](金應燮)이 주도하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참여함으로써 정의부는 분열하였다.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