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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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09-17}}
{{군인 정보
|이름= 고혜진(高惠眞)
|생애= [[7세기]]
|그림=
|별명=
|태어난 곳=
|죽은 곳=
|설명=
|복무= [[고구려]]
|주요 참전 전투/전쟁= [[고구려-당주필산 전쟁전투]]
|복무기간=
|최종 계급=[[남부 욕살]]
|부대=
|지휘=고구려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고구려-당 전쟁]]
|서훈 내역=
|기타 이력=
|}}
'''고혜진'''(高惠眞, ? ~ ?)은 [[고구려]] 말의 무장이다. [[여당 전쟁]] 때 남부 욕살로서 [[고연수]]와 함께 15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에 패하고 투항하였다.
 
 
'''고혜진'''(高惠眞)(? ~ ?)은 [[고구려]](高句麗) 말기의 남부욕살로서, [[고구려-당 전쟁]] 때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 생애 ==
=== 대군을 이끌고 ===
[[645년]] [[당 태종]]의 군대가 [[고구려]]의 여러 [[성 (건축)|성]]을 정복하고 [[안시성]]까지 진군하였다. [[연개소문]]은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에게 고구려와 [[말갈]]의 혼성 병력 15만 명을 주어 안시를 구원하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대로(對盧) [[고정의]]가 이들에게 이르기를 "당 태종은 안으로는 군웅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굴복시켜 [[황제]]에 오른 자로 [[세상]]을 구할 만한 인재이다. 지금 [[당나라]]의 군사들에게 대적할 수는 없다. 일단 싸우지 말고 여러 [[날]]을 대치만 하면서 별동대로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만 못하다.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를 듣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을 40[[리]] 앞두었다. 태종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阿史那社尒)에게 [[돌궐]]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거짓으로 패하여 고구려군을 유인하라 하였다. 고연수 등이 이에 속아 안시성 동남방 8리되는 곳까지 추격해서는 [[산]]을 의지해 진쳤다. 그 [[길이]]가 40리에 이르렀므로 태종도 자못 긴장하였다.
[[당 태종]]이 [[645년]] [[고구려]]를 침략하여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하고 이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자, [[고구려]]는 [[말갈]]과의 연합군 15만여 명을 거느리고 당군에 맞서 나아갔다.
 
[[고구려]] 진영에서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대로 [[고정의]]가 [[고연수]], 고혜진에게 말했다.
 
{{인용문|[[당 태종]]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하지만 [[고연수]], 고혜진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당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3만여 군사를 잃고 포위되어 결국 고혜진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그 뒤 [[안시성 전투]]에서 당군의 피해가 계속되자,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당 태종]]에게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직접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하지만 그 계책은 [[당나라]]의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당군과 같이 전장에 있었으며, [[당나라]]군이 돌아갈 때 따라 돌아갔다.
 
== 군 지휘권에 대한 의문 ==
 
=== 패배와 투항 ===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당시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유는 당시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 15만 명은 당시 고구려 인구 대비 및 각 지역에 이미 배치된 병력을 산정할 때 단일 전투로 동원된 병력으로는 고구려 및 이후 한민족 역사상 최대 규모에 가까우며, 이 정도 대부대를 총지휘할 직급으로 당시 북부[[욕살]], 남부[[욕살]]이었던 고연수나 고혜진으로 보기에는 너무 직급이 낮다고 판단된다. 고연수와 고혜진의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는 이유는 당에 항복했기 때문이며, 항복하지 않았던 다른 고구려 측의 인명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이 당시 당나라 측의 자료 구당서·신당서 등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 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태종이 사자를 파견해와 거짓으로 “너희 [[나라]]의 권력이 막강한 신하가 그 주인을 시해했기에 내가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지 교전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국경]]을 넘어 [[먹이|꼴]]과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 몇 개 성을 취했는데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춘다면 잃었던 것들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것이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고연수 등은 방비를 느슨히 하였다. 태종이 [[밤 (시간)|밤]]중에 작전을 세워 [[이세적]]은 보기 15,000명으로 서쪽 [[고개]]에 자리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은 정예병 11,000명으로 산 북쪽에서부터 좁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고구려군의 뒤를 기습하라 하였다. 태종 자신은 4,000명으로 산에 올랐으며 [[북]]과 [[나팔]]을 울리면 전부대가 일제히 분격하라 명하였다. [[별똥별]]이 고구려군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보고는 들이치려 하였다. 태종은 장손무기군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마자 북과 나팔을 울리고 기치를 들어올렸다. 당나라군이 일제히 몰려들자 당황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부대를 나누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진영은 혼란에 빠지고 [[천둥]]과 [[번개]]마저 내리쳤다. 크게 무너져 3만여 명이 죽었다. 남은 병사를 지휘하여 방어에 임했지만 포위당한 데다 장손무기가 모든 [[교량]]을 끊어 퇴로조차 사라졌다. 결국 남아있던 36,800명을 데리고 항복했으며 고혜진은 [[사농경]]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일부 사학자들은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은 고구려 15만군의 선봉이었고, 총사령관은 당시 사서에 등장하여 전략을 세웠던 대대로 [[고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고정의는 대대로라는 높은 직급과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과거 고구려-수 전쟁 때도 참전한 경험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 당나라 편에서 ===
== 고혜진이 등장한 작품 ==
[[안시성주]]는 안시성에서 [[안시성 전투|오래도록 농성]]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그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얼른 큰 업적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식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가족]]을 아끼는 마음에 자진하여 싸우기 때문에 바로 공략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는 10여만 명을 거느리고도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는 허물어졌으며, 고구려 사람들의 간담도 작아졌습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은 노쇠하여 수비가 건실하지 못합니다. 군대를 그곳으로 돌린다면 아침에 도착하여 [[저녁]]이면 뚫을 것이며 도중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궤주할 것입니다. 그렇게 물자와 양식을 노획하고 북을 치며 전진한다면 평양도 틀림없이 함락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많은 장수들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장손무기가 ‘[[건안성]](建安城)과 [[신성 (요동)|신성]]을 배후에 둔 채 친격하면 친정군이 만전을 기할 수 없다’며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 끝내 [[겨울]]이 오면서 보급이 곤란해진 태종은 철군하였다. 고연수는 도중에 죽고 고혜진은 [[장안]]까지 따라갔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 《[[연개소문 (드라마)|연개소문]]》 [[KBS]], [[2006년]]~[[2007년]], 배우:[[김경하]]
 
== 관련 항목작품 ==
=== 드라마 ===
* 《[[연개소문 (드라마)|연개소문]]》, [[KBS]], [[2006년]] ~ [[2007년]], 배우:[[김경하배우]]: 김경하
 
== 참고 문헌 ==
* [[고구려-당 전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21r_0020 《삼국사기》21권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
* [[주필산 전투]]
* [[고정의]]
* [[양만춘]]
* [[안시성]]
* [[안시성 전투]]
* [[연개소문]]
* [[당 태종]]
 
[[분류:생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