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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대두된 가운데, [[1923년]] 1월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불신을 받는 가운데,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다 회의가 결국 결렬되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과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과 9월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다. 그 결과로 [[1924년]] 10월 남만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정의부는 헌장(憲章) 및 선언(宣言)을 발표하고, 부령(府令)으로서 명칭공포식(名稱公佈式),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행정위원회규칙(行政委員會規則), 공농제도(公農制度), 임원의 임면(任免), 소득세징수규정 등을 의결 공포하였다.
 
==세력과 관할==
정의부는 헌장(憲章) 및 선언(宣言)을 발표하고, 부령(府令)으로서 명칭공포식(名稱公佈式),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행정위원회규칙(行政委員會規則), 공농제도(公農制度), 임원의 임면(任免), 소득세징수규정 등을 의결 공포하였다.처음에 중앙본부를 처음에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義府)의 세력권인관할권인 관전·즙안·, 집안, 환인·, 통화 등 4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2개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정의부는 그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 길림의 [[대차]](大岔), [[신안둔]](新安屯), [[대강자]](大崗子), [[반석]]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말 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17,000여 호, 8만 7천여87,000여 명을 관할하였다.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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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정의부는 [[1925년]] 7월 중앙행정위원회가 [[이상룡]](李相龍)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추천한 것을 계기로 [[1925년]] 말 무장투쟁파와 자치파가 대립하여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가 갈등하면서 분규에 휩쓸렸다휘말렸다. 이에 [[1926년]] 1월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이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였는데, 청년층 무장단들인 무장투쟁파 세력이 자치파 세력을 밀어내고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전만통일회]]에서 제정된 기존의 헌장을 폐지하고 5장 제58조로 된 새 헌장을 제정·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정의부를 창설한 원로급 인사들인 [[양기탁]], [[고할신]](高豁信), [[현정경]], [[오동진]] 등은 [[1926년]] 4월 길림에서 국내의 천도교 혁신파 대표, 형평사(衡平社) 대표,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노령지역의 대표 등과 회합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고, 경상도 출신의 [[김동삼]], [[김원식]](金元植), [[이광민]](李光民) 등은 [[김응섭]](金應燮)이 주도하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참여함으로써 정의부는 분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