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10.8.226.2(토론)의 18034493판 편집을 되돌림
125.134.84.11(토론)의 17388865판 편집을 되돌림
11번째 줄:
주자학에 대립되는 양명학(陽明學)의 전래에다 청조의 고증학이 영·정조(英·正祖) 때에 하나의 새로운 학풍을 이루어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治國)의 이상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혁신운동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다.
 
실학파의 비조(鼻祖)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 [[이익 (1681년)|이익]](星湖 李瀷)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은 현실적인 문제들, 즉 정치의 길(道)·지방제도·경제·과거제도·학제(學制)·병제(兵制)·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니, 앞에 말한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丁若鏞)도 《[[목민심서|목민심서》]],《[[경세유표|경세유표》]]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한편 한국에서 실사구시의 학풍 장려를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양득중(梁得中)이다. 그는 [[1729년]](영조 5)에 실사구시의 학이 이상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임을 왕에게 아뢰어 왕도 ‘실사구시’란 4자를 써서 실내의 벽상에 걸어 놓고 양득중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