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Qkqhrhkdtn (토론 | 기여) |
Qkqhrhkdtn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
12번째 줄:
| 소유 = 국유
| 참고 =
| 면적 = 49,527.4㎡
| 수량 = 6동
| 전승지 =
37번째 줄:
}}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한옥마을]] 부근에 있는
[[
== 역사 ==
전주는 전주 이씨인 조선 왕실의 본관지로써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조정으로부터 우대받았다. [[조선 태종|태종]](太宗) 10년([[14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경기전이 세워졌으며, 조선 태조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전주 외에도 계림 · 평양에도 어용전을 세워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세종|세종]](世宗) 24년([[1442년]]) 각지의 어용전들의 이름을 개칭하면서 전주의 어용전은 처음으로 경기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전주의 어용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종5품) 1명, 참봉(參奉, 종9품) 1명이 배속되었다.
== 현황 ==▼
[[파일:King Taejo Yi 02.jpg|thumb|left|250px|경기전에 소장된 [[조선 태조]]의 어진]]▼
▲[[파일:King Taejo Yi 02.jpg|thumb|left|250px|경기전에 소장된 [[조선 태조]]의 어진(대한민국 국보 제317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위봉산성으로 일시 옮겨지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였다. [[조선 숙종|숙종]](肅宗) 14년([[1688년]])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었으며, [[조선 고종|고종]](高宗) 9년([[1872년]])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금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조선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린 것을 1872년(고종 9)에 고쳐 그린 것이다.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었는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일제 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부지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ref>《전주한옥마을》, 이병천, 채병선, 최상철 저, 대원사(2013년)</ref>
경내에는 조선 태조 어진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조의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복원), [[조선 예종|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ref>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ref>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 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 각주 ==
{{각주}}
==
* [[이성계]]▼
* 『[[태종실록]]』
* 『[[세종실록]]』
* 『[[대전회통]]』
* 『[[증보문헌비고]]』
== 함께 보기 ==
* [[전주 이씨]]
▲* [[이성계]]
== 참고 자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