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52번째 줄:
 
조선 조정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였다. [[조선 숙종|숙종]](肅宗) 14년([[1688년]])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었으며, [[조선 고종|고종]](高宗) 9년([[1872년]])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금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이왕직에 속했으며, 전주 이씨에 한해서만 참배가 허락되었다.<ref>《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ref>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는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