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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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ng Taejo Yi 02.jpg|thumb|left|250px|경기전에 소장된 [[조선 태조]]의 어진(대한민국 국보 제317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조선 조정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였다. [[조선 숙종|숙종]](肅宗) 14년([[1688년]])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었으며, [[조선 고종|고종]](高宗) 9년([[1872년]])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금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일제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는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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