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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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ng Taejo Yi 02.jpg|thumb|left|250px|경기전에 소장된 [[조선 태조]]의 어진(대한민국 국보 제317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위봉산성으로[[위봉산성]]으로 일시 옮겨지기도 했다. 이때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4월 28일에 전주 남쪽 봉우리에서 전주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는 와중에 경기전에까지 대포가 날아들어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기도 했다. 당시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접주 [[전봉준]](全琫準)은 조선 조정에 올리는 소지문에서 "전주감영에 대포 쏜 것이 저희 죄라고는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이를 고발하기도 했다.<ref>김삼웅 《녹두 전봉준 평전》</ref>
 
조선 조정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였다. [[조선 숙종|숙종]](肅宗) 14년([[1688년]])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되었으며, [[조선 고종|고종]](高宗) 9년([[1872년]])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금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시대 경기전은 이왕직에 속했으며, 전주 이씨에 한해서만 참배가 허락되었다.<ref>《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ref>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는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 ~ 제400호)|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