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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부의 성립==
[[1928년]] 9월 길림에서 개최된 3부통일회의는 촉성회와'촉성회'와 협의회로'협의회'로 대립되어 서로 유일당의 촉성과 군정부의 건립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해 12월 하순 촉성회 측은 길림에 모여 회합을 갖고 혁신의회를'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협의회 측은 정의부의 주도 하에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고 [[1929년]] 3월 하순에 새로운 군정부의 조직을 위해 각 부 대표들<ref>정의부 측 대표 [[현익철]]·[[이동림]]·[[고이허]](高而虛)·[[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고할신]], 참의부 측 대표 [[심용준]](沈龍俊)·[[임병무]](林炳武)·[[유광흘]](劉光屹), 신민부 측 대표 [[이교원]](李敎元) </ref>이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 [[1929년]] 4월 1일에는1일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3부를 해체함과 동시에 국민부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ref>정의부 측(주력) [[현익철]]·[[이웅]]·[[김이대]] 외 11명, 참의부 측(심용준파) [[심용준]]·[[이호]](李虎) 외 3명, 신민부 측(민정파) [[송상하]]·[[독고악]](獨孤岳) 외 2명 </ref>을 선임하여 총무·군무·교육·재무·지방의 각부를 담임케 하고 적극적으로 책진희의 박멸을 획책하였다.
 
비록 촉진회 측의 불참으로 전적인 통일은 되지 못했으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였다. 당시 만주에 있는 우리 동포사회의 명제(命題)였던 만큼 그 기대가 컸다.
 
==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