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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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활동==
===한중연합작전 추진===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예하의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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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이 논의를 구체화,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見書)」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내었는데, 이에 대하여 중국 측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협의는 중단되었다. 더우기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할 때 일군경의 기습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 중 [[이호원]](李浩源), [[김관웅]](金寬雄), [[이종건]](李鍾建), [[장세용]](張世湧), [[박치화]](朴致化), [[이규성]](李奎星) 등 중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양기하]](梁基假), [[양세봉]](梁世鳳), [[고이허]](高而虛) 등 중견간부들은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혈전태세를 유지하였다.
 
[[1932년]] 2월 관전현(寬甸縣)에 주둔 중이던 조선혁명군 양기하부대가 평북 초산(楚山)의 일본경찰대와 만주군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아 양기하는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후 혁명군 총사령관에는 양세봉이 선임되어 부대를 지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