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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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교육의 대상에 신분이나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분타(후에 [[이노우에 가오루]]로 개명),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1858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창하다 [[노중]] 수좌(막부의 고관)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안세이 대옥|안세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인 [[안세이]] 6년([[1859년]]) 심문을 받다가 로주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진술한 후 사형판결을 받고 [[음력 10월 27일]]에 참수되었다.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막부에게서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ㆍ일본혼)'를 외쳤다고 한다.<ref name="한국특파원"/> 저서에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