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로봇: 권세가 제거; 예쁘게 바꿈
3번째 줄:
'''김전'''(金詮, [[1458년]] ~ [[1523년]])은 [[조선]] 전기,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능인(能人),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본관은 [[연안 김씨|연안]](延安)이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조선 중종|중종]]이 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13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자 반대하였다.
 
《성종실록》과 《속동문선》의 공저자의 한사람으로 청렴하여 집 한채 없었고, 전답하나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서 스스로를 즐길 정도로 청렴결백하였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 인물의 한사람으로 지목, [[남곤]]과 함께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삼촌이자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김제남 (1562년)|김제남]](金悌男)의 증조부이고, [[조선 선조|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고조부가 된다. 또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小尹)의 [[윤원형]]이 그의 손녀사위였다. 조카인 [[김안로]]와 손녀 사위 [[윤원형]]은 왕실의 인척인 훈구파였지만, 그는 [[김종직]]의 문하생인 [[사림파]]였다. [[김종직]]의 문인.
10번째 줄:
=== 생애 초반 ===
{{참고|성리학|사림파}}
김전은 [[1458년]]에 태어났다. 증조부는 개성유수 [[김자지]](金自知), 조부는 내자시윤 김해(金侅),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신(金友臣)이고 어머니는 지청풍군사 이계충(李繼忠)의 딸 이천이씨이다. [[김안로]]는 그의 조카였다. 배위는 판관 노후(盧昫)의 딸 풍천노씨와 결혼했다가 사별하고 감역 송환주(宋環周)의 딸 진천송씨와 재혼하였다. 소년기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이름을 알리고, 글재주를 익혔으며 그로부터 춘추대의와 [[주자]]에 대한 것을 수학하였다.
18번째 줄:
===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
{{참고|무오사화|갑자사화}}
[[1489년]](성종 21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안군|예안]] 현감으로 올라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때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ref>살아있는 인물의 사당</ref>을 세웠고, 홍문관수찬을 거쳐 1496년(연산군 2년)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홍문관]]전한으로 승진하였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31번째 줄:
[[1513년]]부터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으로 나갔다가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그는 [[조광조]](趙光祖), [[김정]]. [[김식]] 등의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남곤]] 등과 함께 신진 사림의 위훈삭제, 현량과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1518년]] 찬집청당상으로 신용개·남곤(南袞)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편찬하고, 1519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 기묘사화와 암살 위협 ===
{{참고|기묘사화|신사무옥}}
 
[[1519년]] [[심정 (1471년)|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고형산]](高荊山) 등과 함께 모의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는데 협력,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신진 세력들을 숙청시키기도 했다. [[남곤]], [[안당]] 등이 [[조광조]] 일파의 사형에는 반대하고 유배나 감형을 주장한 반면 그는 [[조광조]] 일파를 도와주기를 거절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는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했다가 [[1520년]](중종 15년)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가 되었다.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그와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45번째 줄:
 
=== 사후 ===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흥리(현 고양시 원흥동) 산40-1에 안장되었다. 농협대학 입구 삼거리에서 서삼릉 가는 길로 좌측에 그의 선영과 묘소가 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는 [[1986년]] [[6월 16일]]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57번째 줄:
== 가족 관계 ==
[[조선 중종|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는 그의 형 [[김흔]]의 아들이었다. [[김안로]]는 그의 아들 김희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면서 외척이 되기도 했다. 동시대에 재상을 지낸 김감(金勘)은 그와는 6촌 종형제간이었다.
* 할아버지 : 김해(金侅)
** 아버지 : 김우신(金友臣, 지중추부사, 시호는 호간)
** 어머니 : 이천이씨, 지청풍군사 이계충(李繼忠)의 딸
*** 형님 : 김심(金諶)
*** 형님 : 김흔(金訢)
**** 조카 : [[김안로]]
75번째 줄:
***** 손녀 : 김광국(金光國)에게 출가
***** 손자 : 김희생(金喜生)
**** 삼남 : [[김안수]] (金安遂)
**** 자부 : 강씨(姜氏, 아들 [[김안수]]의 후처)
***** 손녀 : 연안김씨
185번째 줄: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연안 김씨]]
[[분류:권세가]]
[[분류:훈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