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부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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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철희]] [[중앙정보부]] 제1국장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각 군별로 보복 부대를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공군 정보부가 대북 정보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공군 2325부대에 명령하여 같은 해 [[4월]]에 창설한 부대가 209파견대이다. 209파견대는 청와대를 기습한 31명과 인원수를 맞춰 부대를 꾸렸고, 창설된 연도와 달의 숫자를 따서 684부대라는 위장명을 썼다.<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031203020205291 주석궁 대신 청와대로] 한겨레21, 2003.12.3</ref>
 
684부대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철한철저한 [[조선인민군|인민군]]식 실전 훈련을 받았고,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였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만들어진 이들은 3년 가까이 북파 명령을 기다렸으나, [[1971년]] 국제적인 [[데탕트|긴장완화]]와 [[남북 관계#남북적십자회담|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졌다.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684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인천]]에서 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향하던 중 이를 제지하는 군(軍),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탈취한 시내버스의 타이어가 터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간 [[태화상운]] 시외버스(신진 FB100L)를 다시 탈취하여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서울)|대방동]]까지 진입하였다. 이곳에서 군의 방어에 막히자 부대원 대부분이 [[대방동 (서울)|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