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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출처 필요|날짜=2016-12-14}}
|이름= 방효태(龐孝泰) / 방효공(龐孝恭)
'''방효태'''(龐孝泰, [[601년]] ~ 용삭 2년([[662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무장이다.
|그림=
|그림설명=
|출생지= 백주(지금의 [[광시 좡족 자치구]] [[보바이 현]])
|사망일= [[662년]]
|사망지= 사수
|사망원인= [[작전 중 사망|전사]]
|국적= [[당나라]]
|별칭= 시호는 장(壯)
|경력= 남주자사 → 좌효위장군
|직업= [[장군]]
|작위= 건녕현공
|관련활동= [[백제의 멸망]], [[여당전쟁]]
}}
'''방효태'''(龐孝泰) 혹은 '''방효공'''(龐孝恭, ? ~ [[662년]])은 [[중국]] [[당나라]] 초의 무장으로 백주(白州) [[사람]]이다. [[남만]]인으로서 당나라에 협력하였다. [[제2차 여당전쟁]]에도 참여했다가 [[사수 전투]]에서 [[작전 중 사망|전사]]하였다.
 
== 생애 ==
백주(白州)<ref>지금의 중국 [[광시 성]] [[보바이 현]].</ref> 사람으로 [[623년]] 4월 당의 남주자사(南州刺史)로 있으면서 남월주(南越州) 백성인 저도명(宁道明), 고주(高州) 수령(首领) 풍훤(馮暄) 등과 함께 당에 반역하여, 남월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강주(姜州)를 공격하였는데 합주자사(合州刺史) 저순(宁纯)이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자 방효태는 다시 당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623년]]([[무덕]] 6년) 4월([[음력]]) 남주[[자사 (관직)|자사]](南州―)로 있으면서 남월주자사(南越州―) 영도명(甯道明), 고주(高州)의 수령 풍훤(馮暄) 등과 같이 [[당나라]]에 맞서 강주(姜州)로 진공하였다. 흠주도독(欽州都督) 영장진(甯長眞)과 합주자사(合州―) 영순(甯純) 등은 당나라에 협력하여 이들과 싸웠다.<ref>《[[자치통감]]》190권 당기 제6 [[당 고조|고조]] 무덕 6년. 《신당서》남평료전에서는 영순의 관직을 염주자사(廉州―)라 하였으나 염주는 아직 월주를 개칭하기 전이므로 《자치통감》을 따랐다.</ref> [[625년]] 영장진이 강주 봉산현(封山縣)을 함락시킬 때 방효태도 이에 호응하여 풍훤 등을 공격해 패주시켰다.<ref>《신당서》222권下 열전 제147下 남만下 남평료(南平獠)</ref>
 
[[645년]]([[정관 (당)|정관]] 19년) [[제1차 여당전쟁]]에서는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 [[장량 (당나라)|장량]](張亮)의 [[수군]]에 총관으로 종군하였다. [[660년]]([[현경 (연호)|현경]] 5년)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衞將軍)으로 있었다. 좌무위대장군(左武衛―) [[소정방]]이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대총관<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740 〈대당평백제국비〉] 《신당서》본기, 소정방전, 백제전, 《자치통감》은 대표로 신구도라 하였고 《[[구당서]]》소정방전은 웅진도라 하였다.</ref>이 되어 [[백제]]를 [[백제의 멸망|멸할 때]]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따랐다.<ref>《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백제</ref>
[[현경 (연호)|현경]] 5년([[660년]]) 8월, 당의 [[당 고종|고종]]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요청에 따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총관(神丘道行軍總管)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하였고, 방효태 역시 이때 장군으로써 참전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12월에는 패강도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總管)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이 된 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 [[유백영]](劉伯英) 등을 따라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661년]]([[용삭]] 원년)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으로서 패강도행군총관(浿江道―) [[임아상]](任雅相),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 [[글필하력]]<ref>계필하력이 아닌 글필하력이라 읽는다. [[호삼성]] 주석, 《자치통감》198권 당기 제14 태종</ref>, 평양도행군총관 소정방,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 [[소사업]](蕭嗣業), 누방도행군총관(鏤方道―) [[정명진]]과 더불어 다시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총 규모는 35개 군이었다.<ref>《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용삭 원년</ref> 이듬해인 [[662년]] 방효태는 영남(嶺南)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사수(蛇水)를 지키다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사수 전투|대패하였다]]. 혹자가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이나 조계숙(曹繼叔)의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자 “[[당 태종|태종]]과 [[당 고종|고종]]에 걸쳐 당나라에 복무하며 그 은총을 지나치게 입었다. 고구려를 멸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겠다. 유백영 등이 구태여 날 구할 필요는 없다.<ref>伯英等何必救我</ref> 더구나 내가 데려온 고향의 자제 5천여 명이 모조리 죽어버렸는데 어찌 이 [[몸]] 하나만 살아남으려 하겠는가!”라 답하였다. 수만 명이 죽었고, 방효태 자신도 무수한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산화하였다.<ref>《[[책부원귀]]》373권 장사부(將帥部)34 충(忠) 제4</ref> [[작위]]는 건녕현공(建寧縣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壯)이라 하였다.<ref>《[[당회요]]》79권</ref>
[[용삭]] 원년([[661년]]) 4월, 방효태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써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總管)으로 임명되었고 [[임아상]](任雅相), 계필하력, 소정방, [[소사업]](萧嗣業), 정명진(程名振) 등과 함께 35군을 거느리고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용삭 2년([[662년]]) 2월 18일, 방효태가 거느린 영남(嶺南) 병사들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몸소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사수(蛇水)에서 충돌하였고, 전투 결과는 옥저도행군 전군이 몰살당하는 패배였다([[사수 전투]]). 이때 방효태 역시 함께 참전했던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향년 62세로 전사하였다.
 
== 평가 ==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구려군의 공격 앞에서 부장들이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였으나 방효태는 "유백영 등이 무슨 수로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또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지금 다 죽었는데, 어떻게 내 몸 하나만 살길 구하겠는가?" 라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평범한 수준의 무장으로 고구려도 그 수준을 알고 방효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허경종]](許敬宗)은 재물을 받고는 그 전과를 부풀렸으며 당나라의 날래고 용맹한 자는 오직 소정방과 방효태뿐이라며 조계숙과 유백영도 그 아래라는 그릇된 평가를 하였다.<ref>《구당서》82권 열전 제32 허경종</ref>
 
== 각주 ==
{{각주|2}}
<references/>
 
== 참고 문헌 ==
*《[[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고려
 
[[분류:601년광시 태어남출신]]
[[분류:당나라의 장군 (백제 관련)]]
[[분류:중국의생년 역사미상]]
[[분류:601년 태어남]]
[[분류:662년 죽음]]
[[분류:여당전쟁 참전 중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