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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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체사레가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영토에 대한 정복 운동을 시작하면서 루이 12세로부터 빌린 프랑스군이 더해져 강화된 그의 군대는 그녀를 공격하였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놓고 분투적인 방어전을 구상하였다. 이몰라 성은 그녀의 오른팔 디오니지 나르디가 지키고 있었으며, 저항을 오래 지속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1499년 12월에 결국 항복하였다. 카테리나는 포를리 시민들을 충성 서약에서 사면해 주고, 그녀 홀로 라바르디노 성채에서의 방어전에 나섰다. 그녀는 되풀이된 보르지아의 맹공격을 격퇴하면서 평화가 담긴 그의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였다.
 
최종적으로 무기고를 폭파해 적의 침입을 저지하라는 그녀의 명령이 묵살당하고, 카테리나는 백병전 후 사로잡혀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 로마 교황에게 위탁받는 형식을 취해 로마로 연행되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목숨은 보장되었지만 체사레의 불성실한 유린을 모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보르지아의 침공에 직면했을 때, 그녀의 지배 아래 있던 시민들은 물론 일족의 협력마저 충분히 얻지 못하고 패배했던 것은 13년에 걸쳐 탄압과 공포로 일관한 그녀의 통치가 화가원인으로 되었다고 여겨진다지적된다. [[마키아벨리]] 그녀의 통치를 “카테리나가 진정으로 방위전을 고민했다면, 성채에 힘을 쏟기보다 민심의 확보에 더욱 노력했어야 했다.” 며 실패의 사례로 제시하였다. 로마로 끌려간 그녀는 이후 교황 독살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산탄젤로 성]]에서 1년간 죄수로 지냈다.
 
보르지아의 박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피렌체로 도피한 그녀는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선종하면서 보르지아의 힘이 쇠약해지자 자신의 지배권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포를리와 이몰라는 아직 체사레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고 카테리나의 압제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망은 좌절되었다. 카테리나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으로 피신한 후 죽을 때까지 그곳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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