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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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중심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맹 등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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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에 마사리크는 프라하의 체코대학교 철학교수로 부임했다. 철저한 개신교인이었던 그는 신칸트파에 속했으며 영국의 청교도 윤리와 후스파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렐-페르디난드 대학교가 체코 대학교와 독일 대학교로 분리된 뒤 마사리크는 [[프라하]]로 돌아와 강의를 하게 된다. 마사리크는 학생과 강의 주제에 대해 취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태도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관점 때문에 많은 적들을 만든다. 마사리크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몇몇 특징들을 비판했다. 근대 사회를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가톨릭계에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마사리크는 존경받는 철학자로 프라하에 돌아왔고 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동지들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잡지 Athenaeum 주변 사람들의 서클에서 동지들을 만들었다.1896년 프라하의 마사리크 교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프라하에서 결성한 체코슬로바키아 연맹(Československa jednota)은 슬로바키아의 민족 운동을 진일보시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대운동으로 이끌어 가면서 향후 두 민족 간의 통합을 향한 초석을 놓았다. 1898년 슬로바키아의 스칼리차에서 창간호를 발간한 〈목소리〉란 뜻의 〈흘라스(hlas)〉를 중심으로한 자유주의적 사상의 젊은 인텔리겐치아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맹과 긴밀한 협조를 지향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민족적 통합 운동에 동조하였다. 이들 그룹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마사리크의 현실주의 정치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저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