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령 리비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61번째 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를 정복했다. 정복 초기에는 이탈리아가 리비아에 대한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오스만 제국은 1912년 [[로잔 조약]]에서 항복과 함께 리비아의 통제를 포기했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치열한 저항은 이슬람(수니파), 민족주의 그룹, 정치권에서 지속되었다. 이 무리는 [[오마르 무크타르]]의 지휘하에서 [[키레나이카]]의 [[제벨 악다르]] 산맥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저항운동을 지도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은 그들을 제압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이는벌였고 이는 곧 잔인한 징벌적 행위로 바뀌었다. 저항군의 지도자의 끝은 확실하지 않으나 '처형당했다'와 '망명해서 탈출했다' 두 가지 설이 있다. 10만명이 넘는 [[키레나이카]] 사람들은 저항군이 제압된 이후 이탈리아 수옹소에 강제 이주되었고, 20년후에는20년 후에는 이탈리아의 완전한 지배 하에 들어갔다 1930년대에는 리비아를 향한 이탈리아의 파시즘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 [[페잔]] 모두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병합되었다.
 
=== 영토 합의 ===
식민지는 영국과의 조약에 따라 이집트와 수단 지역에 영토의 상황이 변화됨으로써 확장되었다. 1919년에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이탈리아는 독일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으나, 영국은 이탈리아에게 [[주발란드]]를 주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아래의 지역을 제공하기로 했다.<ref>http://www.statoids.com/uly.html Statoids. Retrieved 10 November 2013. </ref>
 
1920년대에 장기간 토론을 결과, 무솔리니-라발 합의를 하였으나 효과는 1935년 까지였다1935년까지였다.
 
그리고 1931년에는 [[엘 테그]]와 [[알 자우프]]가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1919년에 이집트는 [[쿠프라 지구]]를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양도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던 때는 1930년대 초반밖에 안 됐다.1931년에 [[키레나이카]]에서의 캠페인 기간동안 로돌포 장군은 쿠프라 지구를 전략적 지역으로 간주, 20기의 폭격기와 보병 및 포병 3000명을 데려가 손쉽게 정복하였다.
 
사하라지역은사하라 지역은 1934년에 이탈리아 삼각형의 한 부분으로써 1934년에 이탈리아에 인계되었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계획에 진전을 이뤘다.
이 시간 동안, 이탈리아군은 1930년대 중반에 [[엘 태그]]에 [[1차 세계대전]]형식의 요새를 건설했다.우웨이낫 산의 가장 높은 지점은 이탈리아 고원의 상단에 있다. 그것은 [[랠프 앨저 배그널드]]와 마르케세에 의해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 식민지 정착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