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논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잔글 →‎논쟁의 결과: 오자 수정
17번째 줄: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을 통하여 '오직 성경'사상으로 에크의 교회 전통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반로마교황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반면 논쟁 이후 에크는 종교개혁의 확산을 두려워하여 교황에게 루터를 속히 파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1520년 6월15일 교황 레오 10세는 '주여 다시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루터의 책을 불태우고 루터를 파문하였다.
 
루터는 논쟁 이후 6개월 동안 무려 400쪽에 이르는 16개의 소논문을 써서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완성시켰다. 특히 1520년에 쓴 종교개혁 3개의 소논문 《선행론(A Treatise on Good Works)》, 《독일 귀족에게 고함(The Address to the Christan nobility of German Nation)》,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The Babylonian Captivity of Church)》는 그의 발전을 보여주는 최고 수준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들을 통해 루터는 미신적이며 비성경적인 로마가톨릭교회의 롱로공로 사상과 성찬관을 비판하고, 복음적인 정부과정부관, 교회관, 그리고 성례관을 제시하였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