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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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여 기록된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ref>《광해군일기》 [중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11일 11번째 기사 중 "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ref>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또 그녀의 이름이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 각각 '개희(介姬)', '가시(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히'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3109.html 사람이름 - 가히·논개] 한겨레신문, 2007.10.15.</ref>
 
광해군의 아버지인 [[조선 선조|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고,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ref>《광해군일기》 [중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11일 11번째 기사 중 "以春宮舊侍女 因王妃得進御, 仍以祕方驟幸 後宮無與爲伍, 遂與王妃却矣." (동궁전의 옛 시녀로 왕비를 통하여 왕의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비방(祕方)으로을 써서 갑자기 사랑을 얻었으므로 후궁들도 더불어 무리가 되는 이가 없었으며, 결국엔 왕비와 틈이 생겼다.)</ref>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과 손잡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유폐하는데 성공했다.
 
상궁 김씨는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등 그 해독이 커서 [[윤선도]]ᆞ[[이회]](李洄)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녀의 권력은 중전 유씨를 능가하여 광해군이 어느 후궁의 처소에 침소를 드는 것까지 광해군에게 직접 정해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