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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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여|변균여]](邊均如, 923년 ~ 973년) : 고려의 승려
 
* [[변이중]] (邊以中, 1546년 ∼1611년)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1573년 식년문과에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임진왜란(1592년)이 1592년에는일어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비(軍備) 수습에 힘썼다. 이후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행주대첩]](幸州大捷)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저서 『망암집』이 있다.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변득양]]'''(邉得讓, 1723년 ~ 1801년) : 1754년(영조 30)에 진사가 되고,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60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지방]]의 시관(試官)으로서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유생들의 항의로 1762년에 삭직당하였다. 곧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복직되었으나 왕의 부름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1765년 삼례찰방(三禮察訪)에 기용되어 사간원의 헌납(獻納)·사간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69년에 승지에 오르고 1774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뒤 지돈녕부사·부사직(副司直) 등을 거쳐, 1793년(정조 17)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그뒤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08 변득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