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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1396년 완공된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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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태조 5년) 9월 성문을 모두 완성하였다. 정북(正北)쪽에는 [[숙정문|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쪽에는 [[혜화문|홍화문]](弘化門), 정동(正東)쪽에는 [[흥인지문|흥인문]](興仁門), 동남(東南)쪽에는 [[광희문]](光熙門), 정남(正南)쪽에는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쪽에는 [[소의문|소덕문]](昭德門), 정서(正西)쪽에는 [[돈의문]](敦義門), 서북(西北)쪽에는 [[창의문]](彰義門)을 두었으며, [[수문]] 1소(所)를 두었다.<ref group="주">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 이 외에 방위가 담긴 이름은 거의 일제 치하가 될 즈음부터 불리게 된 것이다.</ref><ref>《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 국사편찬위원회], [[:s:태조강헌대왕실록/5년#9월24일 2번째 기사|위키문헌]]</ref>
[[1422년]]([[조선 세종|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조선 문종|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했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했으며,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 철거와 복원 ===
[[1907년]]([[조선 고종|고종]] 44년) [[6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장에 의하여 도성을 철거하기로 정하였고<ref>《고종실록》 48권 44년 6월 22일, 이완용 등이 나머지 성벽을 헐어버릴 것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6022_004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마련하였다.<ref>《순종실록》 1권 즉위년 7월 30일, 성벽 처리 위원회에 대한 것을 공포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7030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1907년 [[9월]]부터 숭례문의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남지를 매립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의 좌우 성벽을 헐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파괴되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6.25전쟁 때에도 평지의 도성이 남이 있었다는 사진이 등장하였다.{{출처|날짜=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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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는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나며 [[청와대]]의 보안을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1993년에는 창의문이 개방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자하문 26년만에 일반공개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0200209127007&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9-0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275&publishType=00010 |뉴스=동아일보 |저자=반병희 |날짜=1993-09-02 |확인날짜=2015-11-08 }}</ref> 이후 2006년 4월 1일에는 홍련사에서 촛대바위까지가 개방되었고<ref>{{뉴스 인용 |제목=’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8861 |뉴스=쿠키뉴스 |저자=윤중식 |날짜=2006-03-19 |확인날짜=2015-11-08 }}</ref>, 2007년 4월 5일에는 나머지 구간인 촛대바위에서 창의문까지가 공개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북악산 40년 만에 전면 개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97029 |뉴스=연합뉴스 |저자=김태식 |날짜=2007-04-05 |확인날짜=2015-11-08 }}</ref> 창의문에서 말바위까지 구간은 하절기(3월~10월)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을 제한한다.<ref>[http://www.chf.or.kr/c1/sub5_4_2_2.jsp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안내 개방시간]</ref> 이 구간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촬영이 가능하며, 신분증 원본을 지참하여야 출입할 수 있다.<ref group="주">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원본만 인정된다. 군사시설이므로 사본이나 사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ref>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2570m 구간 가운데 일부를 삼청지구로 지정하여 1975년 9월 18일부터 1976년 10월 21일까지 성곽 1994m와 여장 1403m를 해체·복원하였고,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 1429m의 성곽을 성북지구로 지정하여 1976년 10월 4일부터 1978년 3월 20일까지 보수함과 동시에 일대 건물을 정비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3">{{
=== 낙산구간 ===
2008년 말 경에는 삼선동 일대의 성곽 외벽을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서울 낙산공원 성곽길 복원된다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272808 |뉴스=국민일보 |저자=남호철 |날짜=2007-03-13 |확인날짜=2015-11-08 }}</ref> 2011년 1월 11일에는 낙산 북쪽 [[창경궁로]]와 연결되는 부분에 7m 고도차를 극복하는 계단을 포함하여 67m 구간이 추가로 개통되었다.<ref name="jangchung">{{뉴스 인용 |제목=서울 성곽 남산 장충동 구간, 낙산 진입부 개방 |url=http://www.fnnews.com/news/201101110811399632 |뉴스=파이낸셜뉴스 |저자=김명지 |날짜=2011-01-11 |확인날짜=2015-11-08 }}</ref> 한편, 낙산공원 정상 일대에는 군 시설, 배드민턴장, 노인정이 성곽과 맞대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서울성곽 곳곳 훼손 심각 |url=http://imnews.imbc.com/replay/2010/nwtoday/article/2541636_13098.html |뉴스=MBC뉴스 |저자=임경아 |날짜=2010-01-13 |확인날짜=2015-11-08 }}</ref>
1979년 6월 1일부터 1980년 8월 12일까지 혜화문부터 낙산 정상까지 성곽 1037m와 여장 1033m를 삼선지구로 정하여 복원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3"/> 또 낙산 정상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성곽·여장 1051m를 동숭지구로 지정하여, 1980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8월 1일까지 543m의 성곽을 보수하였고, 1981년 9월 19일부터 이듬해 6월 16일까지 잔여 구간인 성곽 508m와 여장 520.5m를 복원하며 2개의 암문을 개설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4">{{
=== 흥인지문구간 ===
오간수문은 기단부가 발굴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았고, 축소 모형이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져 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기 위한 발굴 조사 중에 멸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간수문과 일대 성곽이 드러났다.<ref>{{뉴스 인용 |제목=동대문운동장 이간수문 전모 드러내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374066 |뉴스=연합뉴스 |저자=김태식 |날짜=2008-11-20 |확인날짜=2015-11-08 }}</ref> 2009년 10월에 이간수문과 치성 1개를 포함하여 발굴된 142m를 복원하고, 멸실된 123m는 돌을 쌓아 성곽임을 드러내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동대문역사문화공원 27일 부분개장 |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7027021 |뉴스=서울신문 |저자=이은주 |날짜=2009-10-27 |확인날짜=2015-11-08 }}</ref> 퇴계로 347의 건물 오른쪽에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1752년 11월 [[어영청]]의 [[홍봉한]]이 [[청계천]]을 파내고 [[치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1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1028_001&tabid=k 어영 대장 홍봉한이 도성 안의 개천을 파고 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청하다]</ref> 다음달에는 [[우의정]] [[김상로]]의 주장에 따라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 5개를 쌓기로 정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2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2003_001&tabid=k 대신들과 성을 축조하는 일을 의논하다]</ref> 이듬해 5월 24일에는 치성 축조를 끝마쳐 홍봉한에게 상을 내렸다.<ref>《영조실록》 영조 79권 29년 5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905024_001&tabid=k 좌의정 이천보 등이 친히 비를 빌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ref> 그런데 실제 광희문 북쪽에 위치한 치성은 4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 남산(목멱산)구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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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구간 ===
대한상공회의소 서쪽 담장은 발굴된 한양도성 주초 바로 위에 2005년 새로 쌓은 도성이지만<ref>{{뉴스 인용 |제목=헐리고 묻혔던 서울 성곽 18km 윤곽 찾았다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014140 |뉴스=동아일보 |저자=윤완준 |날짜=2008-12-24 |확인날짜=2016-11-28 }}</ref>, 여장이 복원되지 않아 단순한 담장으로 보인다.<ref name="순성즐61">{{
=== 인왕산구간 ===
서울시복지재단 서쪽 담장 아래에 성곽이 여장 없이 남아 있다.
돈의문 북쪽에서 창의문까지의 1626m 구간을 청운지구로 지정하여, 1977년 12월 26일부터 이듬해 7월 15일까지 203.5m를, 1978년 4월 12일부터 이듬해 6월 30일까지 1242.5m를, 1979년 7월 1일부터 이듬해 4월 30일까지 120m를 복원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5">{{
== 각자성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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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태조 4년)에 성을 쌓은 것은 아래와 같다.
{| class="wikitable"
|+ 태조 때의 축성 구간별 표<ref name="도성태조할당"/
|-
! 시작 한자 !! 중간 한자 !! 끝 한자 !! 시작 구간 !! 끝 구간 !! 담당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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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2년(세종 4년)에 성을 보수할 때에는, 태조 때 설정했던 천자문 구간을, 각 도별로 새로이 나누어 할당하였다. 이때 경기·강원·충청도는 “利川(이천)”과 같이 군현의 이름만을 새겼고, 전라도는 “同福始(동복시)”처럼, 경상도는 “河陽始面(하양시면)”처럼 새겼으며, 평안·황해도는 “龍崗下末熙川上來(용강하말 희천상래)”와 같이 상세히 새겼다.
{| class="wikitable"
|+ 세종 때의 보수 구간별 표
|-
! 시작 한자 !! 중간 한자 !! 끝 한자 !! 시작 구간 !! 끝 구간 !! 담당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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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
[[파일:KOCIS Korea Seoul Fortress 20130924 19 (9910949355).jpg|섬네일|오른쪽|흥인지문 앞 각자성석 (2013년)]]
백악구간에는 순조 때의 각자성석이 눈에 띈다. 북악산 청운대(靑雲臺, 293m)를 지나는 성곽의 여장에는 ‘가경구년<ref group="주">가경 9년은 순조 4년(1804년)이다.</ref> 갑자 십월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 용성휘(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라고 새겨진 각자가 있다.
낙산구간에는 흥인지문 앞의 각자성석이 잘 알려져 있다. ‘훈국 책응겸독역장 십인 사 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김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도변수 오유선 일패변수 양산호 이패변수 황승선 삼패변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ref group="주">강희 45년은 숙종 32년(1706년)이다.</ref>사월일개축(訓局 策應兼督役將 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都邊首 吳有善 一牌邊首 梁山昊 二牌邊首 黃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이라고 흥인지문과 마주본 면에 새겨져 있었다.<ref name="사라진133134">{{
남산구간에는 각자성석이 잘 드러나 있다.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성곽 바깥쪽에서 보이는 각자를 북쪽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해진시면(海珍始面), 함안시면(咸安始面),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연일시면(延日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기장시면(機張始面), 울산시면(蔚山始面), 수자육백척(水字六百尺), 예천시면(醴泉始面),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성주시면(星州始面), 선산시면(善山始面)이다.
== 순성 놀이 ==
조선 시대에는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였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고 불렀다.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순성을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언급하였고, 그의 아들 유본예(1777~1842)는 《[[한경지략]]》에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라고 적었다.
현대의 ‘순성놀이’의 이름을 딴 행사는 서울특별시와 시민단체 서울KYC의 주최 하에 2011년 9월 24일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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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group="주" />
;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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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강명관 (2009). 《사라진 서울》. 서울: 푸른역사. ISBN 9788994079066.
* 김도형 (2010). 《순성의 즐거움》. 경기: 효형출판. ISBN 9788958720966.
* 나각순 (2004). 《서울의 성곽》. 서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ISBN 9791160710199.
==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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