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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은 아침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종이 8시경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ref>10월 8일 새벽을 말한다.</ref>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축소 보고은폐===
일본 당국에 시해사건이 처음 전달된 것은 8일 오전 6시 32분발 공사관 수비대 소속 해군 소좌 [[니이로 도키스케]](新納時亮)가 (본국)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중장에게 보낸 전보였다.<ref name="hgs">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ref>그리고 다시 그날 오전 9시 20분, [[니이로]](新納)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電文)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고 보고하고 있다.<ref name="hgs"/>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의 왕후 살해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린 첫 보고였다.<ref name="오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