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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관계 정보
|제목=한미 관계
|나라1=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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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가 독립하면서 [[북위 38도]]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우방 가운데 하나로, [[중화민국]] 다음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특히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하였다. 현재, 양국은 군사적·외교적·문화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깊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 ~ 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지원 속에서 매우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948년]]부터 [[1971년]] 중기에 이르는 동안에 미국은 46억 달러의 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ref name="글로벌 한미관계 서설">《[[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ref> 그 후 4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은 극적인 경제, 정치, 군사적 발전을 경험하였고 그만큼 미국에 대한 의존도도 대한민국의 발전에 비례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휴전이후에도 미국과 대한민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때 대한민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기도 하였다.
[[2009년]] [[6월]] 대한민국과 미국 두 정상은 한미동맹을 기존의 군사동맹 차원에서 벗어나 글로벌 수준의 21세기형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담은 ‘한미 동맹 미래비전’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한반도에 한정됐던 한미동맹의 지리적 범위는 동북아시아 지역은 물론 범세계적 차원으로 넓어지고 내용도 군사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분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21세기형 포괄적 동맹을 지향하게 되었다. 아울러 양국은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핵우산 및 재래식 전력을 제공한다는 ‘확장 억지력’을 채택하였다. 확장 억지력은 미국의 동맹국이 핵공격을 받으면 미국 본토가 공격받았을 때와 동일한 전력 수준으로 응징 타격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이는 정상 차원에서 대(對)북한 한·미 공동방위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 이래, 무역은 양국 간의 심각한 불균형 요소가 되었다. 1989년, 미국은 한국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 되었고 한국은 미국 재화의 7번째로 큰 시장이었고 농산물에 대해서는 2번째로 큰 시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대(對)미국 수출은 562억0770만 USD, 미국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445억6902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미국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2위의 수출국이자 제3위의 수입국이다.<ref>{{웹 인용 |url= http://stat.kita.net/ | 제목 = 국가별 수출입 | 출판사 = 한국무역협회 }}</ref>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문서 공개 이후 상당한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2008년, [[2008년 대한민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논란 끝에 타결하였다.
== 외교사 ==
=== 19세기부터 1910년까지 ===
19세기 중반, [[조선]]은 서구의 통상 요구에 대하여 국경을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1832년부터 1834년까지 코친차이나, 시암, 머스캣에서의 임무를 수행했던 미국의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는 미국 국무장관 [[:en:Louis McLane|루이스 맥레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나, 몇 년 후 그가 병사하는 바람에<ref>{{서적 인용|제목=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 : 1866 - 1882 |url= https://books.google.co.kr/books?id=hRAPN6SZqKUC |저자=Woong Joe Kang |isbn=9780761831204 |쪽=79~80}}</ref> 일본과의 조약은 20년 뒤(1854년)에 실현되게 된다. 1852년 (철종 3년) 음력 12월, 미국의 포경선 1척이 [[동래현]] 용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것<ref>{{서적 인용 | 제목=[[일성록]] |장url =http://e-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e-kyujanggak.snu.ac.kr/home/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800^year=1853^num=^kingname=%EC%B2%A0%EC%A2%85^month=1^day=6 |장= 철종 4년 1월 6일조 |인용문 = 慶尙監司 洪說謨以漂到異樣船問情馳啓}} </ref><ref>{{서적 인용 | 제목=[[일성록]] |장url = http://e-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e-kyujanggak.snu.ac.kr/home/YDG/ILS_CONTVIEW.jsp?ptype=class^subtype=ils^lclass=year^mclass=1800^year=1853^month=1^day=18^kingname=%EC%B2%A0%EC%A2%85 |장= 철종 4년 1월 18일조 |인용문 = 慶尙監司 洪說謨 統制使 李膺緖以異樣船徑發馳啓}} </ref>이 조선과 미국간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중국에 체류하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 W. B. Preston)이 자신 소유의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와 일행을 이끌고
=== 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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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초 [[독일]]의 항복 이후 [[태평양전쟁|대일전]]에 총력을 기울인 [[미국]]은 당시 [[일본]] 내에 "본토 결전"을 외치는 소리가 높음을 감안,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소비에트연방]]군의 참전을 유도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히로시마 시|히로시마]], [[나가사키 시|나가사키]]의 [[핵무기]] 투하 이후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8월 15일 항복함에 따라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당시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en:Edwin W. Pauley|에드윈 폴리]]와 소비에트연방 대사 [[:en:W. Averell Harriman|해리먼]]은 8월 13일 [[해리 S.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비에트 연방]]이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으니 당장 한반도 전역과 [[만주]]를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항복 당시 이미 소비에트연방군은 한반도의 동북부를 폭격하고 있었고, 미군은 [[필리핀]]에 위치해 있어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묵살되었다. 결국, [[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으며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광복(1945년 8월 15일) 이후, 38선 이남에서는 미국군이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시까지 다스렸다. 미국의 군정은 자체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이식하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도 않았고 건준과 인민위원회도 부정하였다.(→[[맥아더 포고령]])
=== 초창기(1948년~1961년) ===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과 국토의 분단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대내적으로 정파(政派)의 난립과 사회혼란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기였던데다가, 북한이 [[38선]] 부근에서 군사적 도발행위를 자행하고 대한민국에서 게릴라와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외교는 처음부터 국가안보외교(國家安保外交)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적 뒷받침이 필요했다는 특수관계 때문에 대미(對美) 외교에 제일 큰 비중을 두어야 했다.
미국과의 정식 국교 수립 후, [[한국 전쟁]]까지의 초창기의 한국의 대미외교는 사회 · 경제적 불안, 맹목적인 국민의 통일염원 및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보장과 지원을 확보하려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적인 것이 못 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사정 때문에 대폭적으로 군사비를 삭감해야 했고, 그 결과로 병력감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한국으로부터의 철군(撤軍)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은 원자탄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지전 또는 제한전은 원자탄의 위협 때문에 발생치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되어, 주한미군의 철수가 전략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대한민국 행정부는 사절단 파견과 주미대사관을 통해 군사원조를 획득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대미 교섭의 논거로 삼은 것은 한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도 있고, 한국안보는 미국에도 중요하며, 소련의 원조와 사주를 받은 북한의 무력남침 위협이 촉박하다는 것, 그리고 한국은 무기만 있으면 즉시 통일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말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 한편 그해 유엔총회에서는 韓國승인과 더불어 外軍철수가 결의되자 그해말부터 美軍이 철수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北傀의 도발을 우려한 李대통령은 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美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의 옛친우인 [[더글러스 맥아더]]를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특사를 먼저 파견해 보았으나, 맥아더의 반응은 냉담했다.(1949년 1월) 결국, 미국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MAG) 의 자격으로 500여명의 병력만 남겨 놓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주한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인천항을 떠날 때 한국군은 그들로부터 구일본군의 총기와 탄약 그리고 미군의
경제면에서는 미군정이 한국에 제공해온 구호적 성격의 가리오아자금([[:en:GARIOA|GARIOA]] 資金,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구제자금)이 경제협조처(ECA,[[:en: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되어 제공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유엔에서 탄핵하고
==== 외교 관계 수립 (1948~49년) ====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1948년 8월)하자 미국은 한국을 승인(1949년 1월)하고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존 무초]]를 임명하였고, 한국에서는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을 임명함으로써 두 나라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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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20일 미국은 이미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무초 특사를 초대 주한 미국 대사로 임명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2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2&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4&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날짜 = 1975-03-12 | 출판사 = 경향신문 |인용문 = <!--...존 무초씨를 ...그 이듬해 韓國정부를 승인한 뒤 곧 3월 20일 초대 駐韓美 대사로 임명했다.--> }}</ref> 한국도 1949년 3월 25일 [[장면]]을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하였다.
==== 한미 군사원조 갈등 (1948~50년) ====
한국 정부는 [[이승만]]의 집권시부터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 충분한 군비(軍備)를 지원해 달라고 촉구해 왔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옛 친우이자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0190032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0-19&officeId=00032&pageNo=1&printNo=632&publishType=00020 大統領今日渡日]〉 경향신문(1948년 10월 19일) 1쪽.
[[유엔 총회]]에서 한국 내 외국군대 철수가 결의되자(1948년 12월 12일)<ref>[[:s:en: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 <!--3. Recommends that the occupying powers should withdraw their occupation forces from Korea as early as practicable;--></ref> 1948년말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 요구에 대해 [[미국 국무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은
이처럼, 미국은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한국측의 정확한 정보를 경시하고,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가 무력북침에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필요한 정도의 군사원조도 제대로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동구(東歐)에서 시작된 미·소간의 [[냉전]]은 확대되어 이미 한반도에서도 날로 격화해 가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en:National Press Club (United States)|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의 연설(1950년 1월 12일 )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의 2개 시금석안(1949년 6월)을 반복해서 지지했다. 즉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로부터 일본의 [[류큐 제도]]를 거쳐 [[필리핀]]에 이른다고 밝힌 다음, 미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의 안보에도 미국의 책임이 지워져 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 <!--그래서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할 때 트루먼 대통령의 2개 시금석안을 반복해서 지지했다. 즉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샨열도(列島)로부터 일본의 류큐제도(琉球諸島)를 거쳐 필리핀에 이른다고 밝힌 다음, 미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의 안보에도 미국의 책임이 지워져 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ref> 즉,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발언은 한국 입장에서 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ref name="글로벌 한미관계 초창기의 대미외교"/> (→[[애치슨 선언]])
애치슨 선언이 있은지 1주일 후인 1월 19일, [[미국 하원]]은 1949년에 제출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안과 연계된 대한(對韓)원조안을 192대 193으로 부결시켰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10400329204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1-04&officeId=00032&pageNo=4&printNo=12391&publishType=00020 戰後史의 軌跡 <29> : 「애치슨 라인」선언]〉 《경향신문》(1986년 1월 4일) 5쪽. <!--“아뭏든 애치슨선언이 있은지 일주일만인 50년1월19일 美하원은 蔣介石정부의 지원안과 연계된 對韓원조안을 1백92대 1백93의 1표차로 부결시켰다.”--></ref> 이로써, 한국경제원조에 차질을 가져왔다. 다음 날(1월 19일),
==== 미국의 한국 전쟁 참전과 상호방위조약(1950년~1953년) ====
[[파일:John Myun Chang 1951.png|thumb|right|200px|장면 대사(1951년)]]
{{참조|한국 전쟁}}
1950년 6월 19일, 미국 CIA는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ref name="cia_mistake">[http://news.kbs.co.kr/world/2010/06/16/2113578.html#//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KBS, 2010.06.16.</ref>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이 무방비 상태인 대한민국을 침범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생하였다.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5시(한국시각 18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51000329204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5-10&officeId=00032&pageNo=4&printNo=12189&publishType=00020 〈맥아더傳記3部「勝利와 不幸」(1945~64)(下)〉]《경향신문》 1985년 5월 10일 5쪽. <!--“한국전 발발에 관한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미(駐韓美)군사고문단(KMAG)의 요청에 따라 개전 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ref>
주미 대사 [[장면]]도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한국군은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6월 30일),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육군]] [[:en:24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광역시|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ref>Varhola, Michael J. (2000). 《Fire and Ice: The Korean War, 1950–1953》 Mason City, Iowa: Da Capo Press. ISBN 978-1-882810-44-4. 2쪽.</ref>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평택시|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ref>[[강준만]], 앞의 책, 68쪽.</ref>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ref>{{서적 인용|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사》 1권|출판사=행림출판|연도=1992|쪽=196~197}}</ref>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4 |url = http://www.kinds.or.kr/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정일화 |쪽 = 5|날짜 = 1990-06-20 <!--url없이 사용됨 |확인날짜 = 2008-04-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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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미군의 중국 공격을 두려워 한 중국은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국(戰局)이 변하여 새로운 전쟁에 직면함에 따라 1950년 11월 2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에서 원폭(原爆)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언명이 있었다.<ref name="장면 회고록">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0페이지</ref> {{Rp|40}}
휴전문제가 제기되어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이 기회에 통일을 완수하려던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집요하게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하여 단독으로라도 통일전쟁을 계속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 경제 원조 외교 촉진(1953년~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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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잇달은 한국 국내정치의 격변과 전쟁 후유증 때문에 외교정책 역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과도적 혼란성을 보였으나 대미외교만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ref name="글로벌 휴전 민주당">《[[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휴전 후 민주당 정부까지의 대미외교|휴전 후 민주당 정부까지의 대미외교]]〉</ref>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외에도, 1953년 7월에는 미국에서 1954년도 한국경제 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데 이어 1954년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방미(訪美)하게 된 것을 계기로 군사 경제 문제 전반에 걸친 토의를 진행시켜 1955년도 군사 경제원조비로서 7억 달러를 획득하였다.<ref name="글로벌 휴전 민주당"/> 1956년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ref name="김영미">김영미, 〈외식문화의 자화상〉한국역사연구회 편《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삶과 문화 이야기》역사비평사(1998) 178~179쪽</ref>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를 차지했다. 따라서 밀가루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ref name="김영미"/> 또한 양국간의 통상관계 정상화를 위해 정부수립부터 계속 노력해 온 통상조약체결 교섭에 성공하여 1956년 11월 28일 전문 25개조로 된 한미우호통상조약(韓美友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으며 1957년 11월 7일 발효된 동 조약에 의해 양 국민의 경제활동·여행·거주·투자에 대한 기준이 확립되었고, 이후 양국간의 주요 경제관계가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다.<ref name="글로벌 휴전 민주당"/> 불과 3개월(1960년 4월~7월)간 존속했던 과도정부시에는 독자적인 정책을 밀고 나갈 형편이 못되었으나 일본의 안보파동 때문에 부득이 일본 방문을 중단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6월 서울을 방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을 재확인한 것은 불안 상태에 있던 한국으로서는 큰 소득이었다.<ref name="글로벌 휴전 민주당"/>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당시는 경제안정을 위한 미국 원조의 최대확보라는 것을 제1과제로 삼고, 1억 8,000만 달러의 원조를 요청·교섭한 결과 요청액대로 확정되었다.<ref name="글로벌 휴전 민주당"/> 1961년 2월 8일에 이루어진 한미경제협정 체결은 큰 사회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협정은 주권국가간의 협정이라기보다는 미국 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가까운 것으로 시종일관 한국 측이 이행해야 할 의무만 나열하였다. 이 협정은 이승만 정권도 끝까지 저항했던 환율 인상 등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협정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의 감독권이 강화되었으며, 미국의 원조사업에 고용된 자들에 대한 특혜조치가 확대되었다. 이 협정은 한국어로 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외무부에서도 영어로 된 것을 번역해서 돌렸는데, 오역이 많았다.<ref>[[서중석 (역사학자)|서중석]], 〈4월혁명운동기의 반미·통일운동과 민족해방론〉《역사비평》제14호(1991년 가을), 133~134쪽.</ref>
=== 제3공화국·제4공화국 ===
==== 우호외교의 강화(1960년대) ====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17일 오전 11시40분(한국 시각), 매그루더는 미 합참에 보낸 전문에서 쿠데타의 목적은 장면 정부의 전복뿐이며 반미-친공의 증거는 없고 오히려 공산주의 제거 프로그램이 가동하고 있다고 보고했다.<ref>이완범, 〈장면과 정권교체: 미국의 대안 고려와 그 포기 과정을 중심으로, 1952~1961〉한국민족운동사학회편,《장면과 제2공화국》(국학자료원, 2003) 60쪽.</ref> 후에 성립한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정부는 전진적인 적극 외교를 표방, 국제관계의 다원화에 대처하여 종전까지의 대미의존 관계에서 대미협력을 통한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미의존도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으나 안보 및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한·미 유대의 강화가 불가결하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계속 큰 비중을 두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의 대미관계는 5차에 걸친 한 · 미정상회담이 대종(大宗)을 이루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미 유대강화와 정상외교|한·미 유대강화와 정상외교]]〉</ref>
[[
혁명정부의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은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11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회담을 개최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군사력 증강의 유지문제 등이 협의 대상이 되었다. 회담 후인 11월 14일에는 장기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및 협력 계속, 무력공격 재개시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원조의 즉각제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후 미국은 1962년 3월 해리먼 미국 극동문제 담당 국무차관보의 방한(訪韓), 1962년 10월의 [[김종필]]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의 방미 등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이를 거듭 확인하였으며, 1962년 9월부터는 행정협정의 체결을 위한 실무교섭에 착수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박·케네디 정상회담|박·케네디 정상회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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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9년 8월에 박대통령이 방미하여 열린 회담에서는 8월 22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 문제에 대한 상호협조, 한국방위공약 준수, 향토예비군에 대한 지원 계속과 월남문제에 대한 긴밀한 협조, 한국의 경제자립 노력에 대한 지원 계속,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기술협력지원의 계속, 한국에 대한 민간투자·합작투자의 강화 등을 확약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 이른바 평화공존의 불가피성이 대두하게 되면서부터 미국의 대공산권의 정책도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69년 7월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여 전후 25년간 지배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적인 전환을 예고했다. 닉슨 독트린은 종래 미국에 의하여 전담되었던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과 대공산권 정책을 종래의 대결에서 대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닉슨 정부 성립 후 미국의 대한(對韓) 우호정책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닉슨 독트린]]에 따른 아시아 정책의 재평가에 따라 점차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적·경제적 역할이 강조되어, 한국의 다변적(多邊的)인 외교관계의 확립과 자체부담 요구가 증대하게 되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박·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박·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ref>
==== 미군의 감축(1970년대) ====
1960년대에 결속강화되었던 한·미 군사동맹은 1970년대 접어들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목표와 공동이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동맹이 결속되었지만, 197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의 외교정책수행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견해 차이의 시발점은
1972년 미국이 중국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동북아시아의 냉전체제에 모종의 변화가 오리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7·4 남북 공동 성명]]이 있었고, 이어 10월 17일 한국내에서는 [[유신 체제]]가 성립되었다. [[닉슨]]과 [[키신저]] 시대에 비롯한 한국에서의 유신체제는 당분간 한미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안보·경제·대 유엔 외교상의 협조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4년 닉슨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은 [[포드]]는 긴급조치로 인하여 미국회에서 한국내 문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이 있음에도 방한(訪韓)하여 한·미 유대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엔에서의 제3세계권의 발언권 강화와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로 유엔군 사령부와 언커크([[:en:UNCURK|UNCURK]])의 해체가 이루어졌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듭 논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은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을 위한 국군현대화에 차질이 없도록 유신 이후에 적극 지원해 주었다.
1976년에 터진 [[박동선 사건]]은 인권문제와 함께 한미관계에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카터의 주한미국 철수정책을 촉진시켰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진입하였다.(→[[박동선 사건]]) 한·미 관계에서 1970년대 후반기 이후 1980년대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정책이었다. 1976년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한 [[카터]] 대통령이 당선이 되자 잠시 한·미 관계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대한 지원정책 비판론과는 달리 카터 행정부는 시종 한국의 군사 및 경제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여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유신 이후의 한미관계|유신 이후의 한미관계]]〉</ref>
=== 제5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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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그러나 이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은 단지 대통령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주성의 표출이라는 의견도 있다. 특히 이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에서 두드러지는데, 전시작전권 환수와 같은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ref>36,37페이지,『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김종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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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수 !!이 름 !! 사진!! 임기 !! width=300px| 비고
|-
|제1대|| [[장면]](張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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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한표욱]](韓豹頊) || || [[1951년]] [[2월]] - [[195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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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양유찬]](梁裕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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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정일권]](丁一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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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장이욱]](張利郁) || || [[1960년]] [[10월]] - [[1961년]] [[6월]] || 전 서울대총장.
|-
|제5대|| [[정일권]](丁一權) || [[
|-
|제6대|| [[김정렬 (1917년)|김정렬]](金貞烈) || || [[1963년]] [[5월]] - [[1964년]] [[10월]] || 전 국방부 장관.
204번째 줄:
|제14대|| [[현홍주]](玄鴻柱) || || [[1991년]] [[3월]] - [[1993년]] [[4월]] || 전 법제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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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한승수]](韓昇洙) ||[[
|-
|제16대|| [[박건우]](朴健雨) || || [[1995년]] [[1월]]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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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이홍구]](李洪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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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양성철]](梁性喆) || || [[2000년]] [[8월]]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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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한승주]](韓昇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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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홍석현]](洪錫炫) || || [[2005년]] [[2월]]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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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이태식 (1945년)|이태식]](李泰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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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한덕수]](韓悳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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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대 || [[최영진]] || || [[2012년]] [[2월]] - [[2013년]] [[5월]] || 전 유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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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
=== 경제 원조 ===
[[1956년]]부터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ref name="김영미"/>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를 차지했다. 따라서 밀가루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ref name="김영미"/> 따라서,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의 농촌 경제에 치명타였다. 1956년부터 들어온 미국 원조는 모두 농산물이었다.<ref name="역사학연구소">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풀빛(1995) 291쪽.</ref> 이는 한국의 식량문제 해결의 뜻도 있었지만 1948년부터 계속된 미국의 농업 공황에서 벗어나보려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ref name="역사학연구소"/> 게다가 이승만 정권이 정치자금 확보용으로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들여옴으로써 농촌 경제는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ref name="역사학연구소"/> 저렴한 밀 값으로 인해 짜장면, 과자, 빵류, 국수 등이 한국 국민의 대용식으로 크게 각광받게 되었다. 무상으로 제공된 밀을 밀가루로 제조하는 제분업도 성장하였는데 [[제일제당]], [[삼양사]], [[조선제분]], [[대한제분]]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ref>이한구, 《한국재벌형성사》비봉출판사(1999) 66쪽.</ref> 미국 원조에 의해 성장한 산업은 제분업 이외에도 설탕과 면화 산업 등이었는데, 이 세 가지 산업을 가리켜 이른바 삼백(三白)산업이라 불렀다.<ref name="역사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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