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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의 경제적 배경 서술.
'''평양대부흥'''은 [[1907년]] [[1월 14일]], [[평양직할시|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던 중,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뉘우쳤던 일 이후 일어났던 평양의 기독교 신자 수 폭증 현상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고백과 뉘우침, 새로운 삶을 선언하는 운동이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면서 [[조선]]의 기독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를 ‘평양대부흥 운동’ 혹은 ‘성령 대부흥 운동’이라고 부른다.
 
개화기 [[천주교]] 탄압으로 악화된 대외 신뢰도 추락을 악습인 [[억불 정책|억불]] 사상을 기반으로 [[불교]]에 이유를 물어 [[유교]]에 친화적이라며 [[개신교]] 신앙 지원에 조선 [[왕실]]은 열중<ref>{{웹 인용|출판사=다음|url=http://tip.daum.net/question/81092146|제목=다음TIP 명성황후에 대해서|작성일자=2014-05-14
}}</ref>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언더우드]] 부부가 오지(奧地) 방문 여행을 했으며 선교 여행을 막 끝낸 시점이기도 한 상황에서 황후가 내린 결혼 반지 선물<ref>{{웹 인용|출판사=경제풍월|url=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60475|제목=[옛 사람과 삶 그때 이야기⑩] 조선의 슬픈 죽음(상투의 세월)|작성일자=2012-05-28}}</ref>에서는 본심이 드러난다. 기독교 교세가 국내외 [[의회주의]] 확산에 영향으로 왕실의 [[한양]]에서 [[절대왕정]]을 추종하던 유교를 활용한 영향력<ref>{{웹 인용|출판사=새미쥬얼리|url=http://m.semigold.co.kr/insiter.php?design_file=916.php&article_num=315&SI_F_serial_num=asc&pc=p&PB_1419581562=3|제목=보석상식 한국 근대 광고로 보는 여성 장신구(2)|작성일자=2015-06-01}}</ref>을 위협할 지경까지 이르자 [[왕당파]]들이 의도적으로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일으킨 부흥일 수 있다. 의회주의를 거수기(擧手機) 같이 명목 상으로만 유지하는 [[공산주의]] 왕정에 의한 핍박을 받게 된다.
==바깥 자료==
*[http://www.1907revival.com/ 1907REVIV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