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빈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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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숭과 격하 ===
이후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그녀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으며, 능호는 성릉(成陵)이라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광해 26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3월 29일(을사) 1번째기사</ref> [[1613년]]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고명을 받아오기도 했다.<ref>《조선왕조실록》 광해 73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12월 11일(갑오) 8번째기사 "공성 왕후 책봉 주청사 박홍구·이지완이 길을 떠나다"</ref> [[1616년]](광해군 8년) 명헌의 존호가 더해졌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위치도 원래대로 돌아갔고 그녀의 왕후로서의 시호와 왕릉도 모두 추탈되고 격하되었다. 다만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녀의 묘인 [[성묘 (공빈 김씨)|성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송릉리에 있으며, [[1991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549&mobile&categoryId=15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묘〉항목]</ref>.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