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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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년]]([[무덕]] 6년) 4월([[음력]]) 남주[[자사 (관직)|자사]](南州―)로 있으면서 남월주자사(南越州―) 영도명(甯道明), 고주(高州)의 수령 풍훤(馮暄) 등과 같이 [[당나라]]에 맞서 강주(姜州)로 진공하였다. 흠주도독(欽州都督) 영장진(甯長眞)과 합주자사(合州―) 영순(甯純) 등은 당나라에 협력하여 이들과 싸웠다.<ref>《[[자치통감]]》190권 당기 제6 [[당 고조|고조]] 무덕 6년. 《신당서》남평료전에서는 영순의 관직을 염주자사(廉州―)라 하였으나 염주는 아직 월주를 개칭하기 전이므로 《자치통감》을 따랐다.</ref> [[625년]] 영장진이 강주 봉산현(封山縣)을 함락시킬 때 방효태도 이에 호응하여 풍훤 등을 공격해 패주시켰다.<ref>《신당서》222권下 열전 제147下 남만下 남평료(南平獠)</ref>
 
[[645년]]([[정관 (당)|정관]] 19년) [[제1차 여당전쟁]]에서는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 [[장량 (당나라)|장량]](張亮)의 [[수군]]에 총관으로 종군하였다. [[660년]]([[현경 (연호)|현경]] 5년)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衞將軍)으로 있었다. 좌무위대장군(左武衛―) [[소정방]]이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대총관<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740 〈대당평백제국비〉] 《신당서》본기, 소정방전, 백제전, 《자치통감》은 대표로 신구도라 하였고 《[[구당서]]》소정방전은 웅진도라 하였다.</ref>이 되어 [[백제]]를 [[백제의 멸망|멸할 때]]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따랐다.<ref>《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백제</ref>
 
[[661년]]([[용삭]] 원년)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으로서 패강도행군총관(浿江道―) [[임아상]](任雅相),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 [[글필하력]]<ref>계필하력이 아닌 글필하력이라 읽는다. [[호삼성]] 주석, 《자치통감》198권 당기 제14 태종</ref>, 평양도행군총관 소정방,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 [[소사업]](蕭嗣業), 누방도행군총관(鏤方道―) [[정명진]]과 더불어 다시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총 규모는 35개 군이었다.<ref>《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용삭 원년</ref> 이듬해인 [[662년]] 방효태는 [[영남 (嶺南중국)|영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사수(蛇水)를 지키다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사수 전투|대패하였다]]. 혹자가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이나 조계숙(曹繼叔)의 진영으로 탈출하기를 권하자 “[[당 태종|태종]]과 [[당 고종|고종]]에 걸쳐 당나라에 복무하며 그 은총을 지나치게 입었다. 고구려를 멸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겠다. 유백영 등이 구태여 날 구할 필요는 없다.<ref>伯英等何必救我</ref> 더구나 내가 데려온 고향의 자제 5천여 명이 모조리 죽어버렸는데 어찌 이 [[몸]] 하나만 살아남으려 하겠는가!”라 답하였다. 수만 명이 죽었고, 방효태 자신도 무수한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산화하였다.<ref>《[[책부원귀]]》373권 장사부(將帥部)34 충(忠) 제4</ref> [[작위]]는 건녕현공(建寧縣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壯)이라 하였다.<ref>《[[당회요]]》79권</ref>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