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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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증강 이후 마케도니아는 [[페르가몬 왕국]]을 침공했다. 페르가몬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이에 따라 그리스로 군대를 보냈다. 이것이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군이 로마의 육해군에게 우세를 보였다. 따라서 로마는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 군대에 맞설 인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그리스에 파견했다.
[[File:Pydna.svg|thumb|left|전투 전 부대 이동]]
 
 
그리스에 도착한 파울러스는 빠른 속도로 페르세우스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페르세우스는 주위를 성벽과 울타리로 방어선을 탄탄히 하고, ‘올림포스의 산자락이 바다에 가라앉은 근처’에 진을 치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ref>[[플루타르코스]], 「아이밀리우스」, 13</ref> 며칠 동안 양군은 대치를 했고, 파울루스는 주변을 조사하여 피티이온과 페트라를 거쳐 페라이비아로 빠지는 길이 무방비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8,200명의 보병과 120기의 기병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나시카 코르쿨룸]]에게 주어 그 길을 통해서 연안 지역까지 돌아가 적을 포위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ref>ibid, 15</ref> 그러나 이 계획은 로마군에서 탈영한 크레타인에 의해 페르세우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용병 10,000명와 마케도니아 병사 2,000명을 밀론에게 줘서 적을 상대하게 했다.<ref>ibid, 16</ref> 그러나 밀론은 나시카에 패배하였고, 이를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피드나로 후퇴했다. 당시 마케도니아 진을 구축한 곳은 평탄한 지형으로 [[팔랑크스]]가 포진하기에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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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전==
[[File:Plan battle of Pydna-en.svg|thumb|right|전투 배치도]]
전투는 다음날 오후에 시작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전투의 시작은 파울러스가 적의 공격을 유발하기 위해 재갈을 채우지 않은 말을 풀어놓고 로마 병사에게 쫓게 했다고 전한다. 또는 로마군의 말을 마케도니아 측의 [[트라키아]] 병사가 덮쳐, 로마 측의 [[리구리아]] 병력 700명이 교전을 시작했고, 여기에 가세하면서 전투가 확산되어 양군의 전면 충돌을 가져왔다고 전한다.<ref>ibid, 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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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File:Jean-François-Pierre Peyron 001.jpg|thumb|right|250px|파울루스에게 항복하는 페르세우스,[[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1802년작. [[부다페스트 미술관]]]]
전투에서 패배하고 패주한 페르세우스는 병사는 커녕 성문을 걸어 잠군 주민들에게도 버림 받고 재산은 크레타 인들에게 빼앗겼다. 사모트라케 섬까지 피신을 하였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 후 로마의 파울루스의 승전 개선식에서 전리품으로 아이와 함께 구경거리가 된 뒤 연금되었다가 옥사를 한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패전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네 개의 공화국으로 해체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6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년)로 계속 이어온 헬레니즘 세 왕국이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