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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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에는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황제에 의해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라디슬라프 포흐로베크)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프라하에서 소집된 보헤미아 의회는 이르지를 라디슬라우스의 [[섭정]]으로 추대했다. 그렇지만 후스파와 교황파 간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이르지는 미묘한 입장에 처했다.
 
[[1453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한 라디슬라우스는 교황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특권과 계약을 인정했다. [[1457년]] 라디슬라우스 국왕이 급사하면서 라디슬라우스가 이르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독살당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렇지만 [[1985년]]에 있었던 시신 부검에서 라디슬라우스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458년]] [[2월 27일]] 보헤미아의 사회 계급 지도자들은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추대했다. 교황파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그의 온건한 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국인 지배자를 싫어하는 민중의 감정을 고려하는 등 이르지에게 투표했다. 이르지는 프라하 협정에 따른 온건한 통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부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르지와 적대 관계에 있던 [[교황 비오 2세]]는 포데브라트 가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프라하 협정의 무효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