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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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으로 자신의 형인 [[이징석]], 아우인 [[이징규]]가 정난공신의 주청으로 한때 처형과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세조|세조]]의 극진한 대우로 그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까닭은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는 이징옥과 서로 반목하였던 사이<ref>문종 5권, 즉위년(1450년) 12월 29일 5번째기사</ref>였고,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던 세조는 이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기 때문에 이들을 살렸던 것이다.
 
후일 [[채제공]]은 그가 [[조선 단종|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는 아니라고 하였다.<ref name="dan1">[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9023&v=43 이징옥의 난]</ref> [[채제공]]에 의하면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조선 단종|단종]]의 복위가 목적이며, 단종실록의 내용처럼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ref name="dan1"/>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징옥은 [[정종 (조선의 무신)|정종]](鄭種), [[이행검]]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그의 난 이후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거병 실패와 암살 ====
그는 용맹하기가 범과 같아서 [[여진족]]들이 이징옥을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부르며 '큰 범' 김종서만큼이나 두려워하여 감히 그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징옥은 일찍이 오래도록 변방에 근무하고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여진족]] 사회에까지 명성을 알리고, 일이 여의치 못할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족]] 지원군과 합세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려고 [[10월 20일]]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에 머물러 밤을 새울 때, 조정에서 파견한 자에게 설득당한 [[종성군|종성]][[판관]] [[정종 (조선의 무신)|정종]](鄭種)·[[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이 이끄는 자객단의 습격을 받고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향년 53세였다.
 
그의 막내인 셋째 아들 연원(淵源)만이 유모의 등에 업혀 [[경주시|경주]]로 간신히 피신하여 목숨을 건지고 이름을 태엽(台燁)이라 바꾸었으며, 본관은 초산(草山)으로 하여 맥을 이었다(훗날 이연원의 후손들이 본관을 초산에서 본래의 본관인 [[양산시|양산]]으로 환원한다).